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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의 여론 女論] 조선의 운명을 농촌에서 개척하고자 한 황애시덕

중앙일보 2012.08.20 00:06 종합 32면 지면보기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1930년 가을 황해도 수안의 산골 깊은 곳에 옥색 양산을 한 손에 쥐고 한 손엔 도면을 쥔 두 명의 신여성이 나타났다. 여성운동가 황애시덕(黃愛施德·1892~1971)과 그녀의 협성여자신학교 동료교사인 홍애덕이었다. 그들은 이곳의 토지 10만 평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녀의 제자들이었던 최용신·김노득 등을 데려와 농토를 개간하고 소작료를 폐지하였으며 집을 짓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주도한 것은 모두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여성의 평화촌(平和村)’이라 불렸다.



 “뜻 있는 여성들 손으로 이제 이 수안평야 위에 크나큰 집단적 농장인 평화촌이 건설되려 한다. 우리는 귀를 깨끗한 물에 정하게 씻고 평화촌을 건설하기 위하여 수백 수천 명의 아가씨들이 섬섬옥수에 괭이를 잡고 땅을 파는 소리와 서까래를 올리고 기둥을 세우는 여자목수의 망치소리를 듣기를 준비하자. 황해도에 해 돋았다. 이 건설적 의도에 끓는 여성들의 망치소리와 부삽소리에 황해도 산천은 점점 피어날 것이구나.”(‘여성의 평화촌’, 삼천리, 1932.3)



 황애시덕은 평양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송죽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2·8독립선언에도 참여하였고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애국부인회 활동을 하다가 다시 2년여의 수감생활을 겪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28년 귀국했는데 이때부터 그녀가 가장 중점을 둔 활동이 농촌계몽운동이었다.



 ‘평화촌’의 건설은 황애시덕의 농촌계몽운동 구상 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공동육아소, 소비조합, 학교, 극장 등까지 건설하여 조선의 농민들에게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비록 1935년 그녀의 꿈은 일제의 탄압 등으로 좌절되었지만 그녀와 이 운동에 동참한 여성들 모두의 노력은 숭고한 것이었다. 이 운동에 동참했다가 과로로 요절한 최용신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모델(채영신)이 되기도 했다.



 황애시덕이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조선의 운명이 농촌문제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농촌과 농민이 조선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땅과 농민을 너무 홀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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