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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헝그리 정신에서 좋아하고 즐기는 경지로 우리 스포츠가 달라졌다

중앙일보 2012.08.07 00:44 종합 31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올림픽 종목 훈련장비 가격을 소개해 놓은 인터넷사이트를 보았다. 승마 15억~20억원, 요트 5000만원. 당연하지 싶다. 사이클(경주용 자전거) 2000만원도 이해가 된다. 런던 올림픽에서 금 2, 은 1, 동 3개로 메달 대박을 낸 펜싱은 대략 300만원으로 소개돼 있었다. 마스크·유니폼·신발 외에 블레이드(칼)가 약 120만원으로 값이 꽤 나갔다. 게다가 블레이드는 한 달에 한두 개 구입해야 하는 소모품이란다. 가장 싼(?) 종목이 유도와 레슬링이었다. 유도는 도복 두 벌에 40만원. 맨발이니 신발값은 안 든다. 레슬링은 유도복보다도 옷감이 덜 들어서인지 유니폼과 신발을 합쳐 달랑 20만원.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도 얼마 전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지 종목별로 분석했다. 런던 올림픽 미국 펜싱 대표로 선발된 한 선수는 1년에 대략 2만 달러(약 2300만원)가 들었다. 체조 선수 자녀를 키우는 미국인 가정은 훈련비·교통비로 한 달에 1000만원 가까이 써야 한다.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어서 종목을 바꿔 학교 핸드볼팀이나 조정팀에 들어가는 게 낫다나.



 2008년 베이징(여름), 2010년 밴쿠버(겨울)까지 한국은 여름·겨울 올림픽을 통틀어 91개의 금메달을 땄다. 덕분에 런던 올림픽에서 총 금메달 100개를 돌파했다. 하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이전에는 돈이 들지 않는 ‘헝그리 종목’에 메달 여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세였다. 레슬링·복싱·역도·유도…. 투자 부담이 거의 없는, 개인의 몸과 정신이 뿜어내는 투지와 집념이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였다. 일제 시절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남승룡이 따낸 금·동메달도 맨 몸뚱어리로 죽자고 달리는 마라톤에서였다. 우연이 아니다. 나라가 가난해서였다. 변변한 수영장 시설조차 없는 나라에서 개헤엄깨나 친다고 세계무대에서 통할 리 만무했다.



 런던 올림픽의 메달 목록은 한국이 헝그리 스포츠에서 즐기는 스포츠로 진화했다는 의미 있는 증거다. 불모지인 줄 알았던 펜싱이 그렇고, 금메달을 3개나 쏴 맞힌 사격이 그렇다. 과거 사격은 군인들의 전유물이었고 88 서울 올림픽에서 처음 메달(은)을 딴 차영철도 국군체육부대 준위 신분이었다. 그러나 군이 독점하던 화약총 종목을 민간에 개방하자 진종오·김장미 같은 민간인 총잡이들이 쑥쑥 자라날 수 있었다.



 먹고살 만해진 덕분이다. 젊은 대표선수들이 투지·집념에 재미까지 얹어 신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이 뿌듯하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신세대의 발랄함을 보여준 빙상 선수들과 겹쳐지는 풍경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워서 한다. 대한민국 스포츠가 밝고 힘차졌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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