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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양형기준제는 절대지존인가

중앙일보 2012.08.03 00:00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재홍
김앤장 변호사
전 서울행정법원장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여기서 8할은 본질적 요소를 뜻할 것이다. 형사재판의 8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양형(量刑)이다. 필자가 형사단독판사였을 때 가장 큰 고민은 양형이었다. 법정형 이외에는 특별한 기준이 없는 현실에서 법정형의 범위는 너무 넓었다. 마치 바다를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결국 관행과 직관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적정성과 공평성, 일관성이 부족한 듯했고, 사회에서도 ‘고무줄 양형’이니 ‘전관예우’니 비판이 많았다.



 그러던 중 1988년 법관 해외연수로 미국에 갔다가 그때 막 시행되던 양형기준제에 접했다. ‘아! 이런 것도 있구나’ 눈이 번쩍 뜨였다. 사회적 비판도 막고, 스스로 양형의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귀국하자마자 이 제도의 시험적 시행을 주장했으나 좌절됐다. 15년이 흐른 뒤 국회 입법으로 이 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나 현재 시행되고 있는 것은 내가 그리던 제도와는 차이가 있다. 이상적인 양형기준제란 절대적인 틀로서 법관들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권고적 참고자료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양형기준은 절대적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준수율(90%)이 그 원조국가인 미국(60%)보다 훨씬 높다.



 양형기준제는 과거의 양형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됐다. 그리하여 직관과 관행에 따랐던 과거와는 정반대로, 요소별로 가려내고 분석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 요소를 O, X식으로 평가하므로, 정도(程度)의 측면은 무시된다. 이러한 평가방식은 바람직한가? 각 부분 간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가장 중요한 면이 누락되고, 요소별 정도의 차이도 무시된다.



 이를 보완하는 것은 법관의 직관과 전체적인 시각이다. 법관의 경험과 철학, 전인격적 판단이 그것이다. 과거의 양형이 정(正)이라면 양형기준제는 반(反)의 역할을 하며, 법관은 정과 반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 합(合)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현재 법원은 반(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양형기준이라는 지붕 밑에 여론과 비판의 비(雨)를 피하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 경제범죄에 대해 법정형을 15년 이상으로 높여 집행유예를 원천봉쇄하자는 논의가 있다. 게다가 그 분류기준은 기본적으로 금액이다. 종래 중시되던 범행의 악성 정도, 범죄자의 관여 정도, 실질적 피해의 정도보다도 앞선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과거의 양형 관행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임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살인범보다 3배는 나쁘게 본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우리 사회의 충동적 흐름과 포퓰리즘적 분위기에 씁쓸한 기분을 금할 수 없다.



 형사재판과 관련해 두 가지 도그마(dogma)가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첫째, 양형기준은 옳고 이에 따라야 한다. 둘째, 경제범죄는 엄벌되어야 하고 금전의 액수가 가장 중요하다. 이 도그마들은 일관성과 형평성이 부족했고 특히 경제범죄에 지나치게 관대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모든 도그마는 다른 도그마들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반대의 도그마로부터 견제되고 보완되어야 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반대편 절벽에 부딪혀 깨어진 후 다시 반대의 극단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만약 법관이 양형기준에 지배되거나 그 속에 안주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되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한다면, 그리고 경제범죄는 그 범죄의 성격이나 피고인의 관여 정도를 가리지 않고 금액에 따라 무조건 엄벌한다면, 그것 역시 헌법이 상정한 법관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미 쟁취한 지금 이 시대에서 법관의 독립성의 진정한 의미는 경직적 기준이나 가변적인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재홍 김앤장 변호사 전 서울행정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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