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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예비역 육군병장의 편지

중앙일보 2012.07.31 00:29 종합 32면 지면보기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휘영청 보름달이 무척이나 밝은 밤이었다. 멀건 육개장 저녁을 ‘특식’으로 끝내고 침상에 쪼그려 TV를 보는 중 어디선가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뒤편에 집합하라는 고참의 명령. 다섯 명의 입대 동기들은 속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나가 부동자세로 정렬했다. 오 분쯤 지났을까? 술에 불콰해진 고참병 둘이 나타나 “솔직히 말하라”며 “고향 생각이 나느냐”고 엉뚱하게 물었다. 고향 생각, 나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간절한 추석 전날 밤이었다. 이구동성 “네”라고 대답했다. 순간 여기저기 무섭게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등병들이 군기가 빠져 군대에 와서 집 생각 하고 있다니, 고향 생각 나지 않게 해주겠다”는 고함과 함께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나 또한 어디서 들은 대로 다치지 않게 맞는답시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바쁘다.



 잠시 뒤 다른 선임병이 부드럽게 물었다. “고향 생각이 나느냐”는 똑같은 질문이다. 아니, 누구를 바보로 아나. “아닙니다”라고 악에 받쳐 대답하자 다시 주먹이 날아들었다. ‘군기가 빠져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등병이 벌써부터 군기가 빠져 거짓말을 하면 이 나라 이 강산은 누가 지키느냐”는 훈계와 함께 구타는 한 시간가량 계속되다 끝났다. 세면장에 가서 터진 입술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상에 누우니 너무나 간절히 고향 생각이 난다.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에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김광석 이등병 편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기 시작했다. 건너 침상 입대 동기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그 또한 울고 있음이 분명하다. 80년대 어느 추석 전날 밤 군대 풍경이다.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그야말로 옛날 얘기로 지금의 군대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군대 얘기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군대와 축구 얘기를 빼면 남자들은 할 얘기가 없다. 그리고 여자들은 아예 고개를 돌린다. 군대는 한국 남자들의 영원한 어젠다이자 트라우마다.



 백사(白蛇)를 뽀얗게 고아 중대장에게 상납한 덕에 GP에서도 매달 휴가를 나왔다는 부러웠던 선배가 알고 보니 동사무소 방위병을 일컫는 똥방위 출신임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 주말마다 외출증 끊어 이대 앞을 주름잡았다는, 부모를 잘 둔 신의 아들들이 들려주는 허풍에 기죽었던 느낌들. 그리고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내무반을 바라보며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며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들이켜는 TV 광고가 오히려 그리운 기성세대가 됐다. 그리고 그때의 군번은 아내 몰래 꼬불쳐 둔 통장의 비밀번호로 사랑받는다.



 남녀평등 논란을 불러온 ‘군 가산점제’ 논쟁이 뜨겁다. 99년 헌재가 ‘여성과 장애인·군 미필자 등에게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과 공무담임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최근 국방부가 재도입을 추진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대선을 의식한 정치권까지 가세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나는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병역 미필자라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일관된 목소리로 반대해 왔다. 곰곰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만큼 남성 위주 사회가 또 있을까? 고위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 임원 성비만 한번 살펴 보라. 시시콜콜한 화장실까지 남성 위주다.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 아니라 강철 천장이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군대, 진짜 힘들다. X뺑이 쳐본 사람은 안다. 그렇지만 헌재가 위헌 판결한 이 마당에 또다시 가산점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고 보니 절망적이었던 그 시절도 그리 소모적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결혼해 절대로 아들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시절, 그래도 가끔 돌이켜 보면 소중한 추억으로 살아 있다. 장려했느니, 군에서 보낸 우리의 젊음이여! 그래서 처절하고 쓰라렸던 그 시절도 내게는 토첼리의 세레나데 ‘우리 기쁜 젊은 날’로 각인돼 있다. 군 가산점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 미래의 나의 아내와 딸들을 위해 남자들이 앞장서 받지 않기를 선언하면 어떨까? 예비역 ‘육군병장 김병장’이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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