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철 교수의 부자학 강의
겉으로 드러나길 꺼리는 패밀리 오피스의 속성상 정확한 숫자를 집계하긴 어렵다. 미국에 4000개 정도가 있다고 하고 세계적으로 1만 개에 육박한다는 추산이 있다. 2008년 이후 미국·유럽발 금융위기로 구미의 패밀리 오피스들이 싱가포르·홍콩 등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시아 쪽으로 옮겨오는 추세다. 아시아에는 신흥 부호가 많아 패밀리 오피스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법규로는 부자나 기업이 별도의 패밀리 오피스를 원칙적으로 설립할 수 없다. 하지만 대기업집단의 본부 조직이나 금융회사의 VIP 서비스 등 그 기능을 일부 해주는 형태는 늘고 있다.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나 비서실은 사실상의 패밀리 오피스다. 오너는 법무·재무·홍보 조직을 통해 법률·회계·금융지원이나 이미지 관리 서비스를 받는다. 그룹 비서실이나 계열사가 암묵적으로 패밀리 오피스 기능을 도와주는 것이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을 일으켜 재산가가 된 이들이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다. 동네 은행이나 증권사 프라이빗뱅킹(PB) 점포에 찾아가 귀동냥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 패밀리 오피스 기능이 시급한 곳은 재벌보다 동네 부자다. 실제로 매출 수백억원대 정도 업체 오너를 종종 접하는데 불황기 자산관리나 2세 승계 등 문제로 끙끙 앓고 있었다. 단독으로 힘들면 중소기업주들이 모여 멀티 패밀리 오피스(Multi Family Office)라도 구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내 크고 작은 부자 조직은 1만 개 정도로 추산된다. 지역별 로터리클럽·라이온스클럽 같은 외국계 봉사단체를 비롯해 지역별 상공회의소,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 등이다. 서울 강남이나 성북동 같은 부자동네의 부녀회, 지방 유지들의 사교모임도 부자조직에 속한다. 이런 조직들도 멀티 패밀리 오피스를 지향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전문가 양성도 시급함은 물론이다.
어떤 형태든 우리나라에선 진정한 의미의 패밀리 오피스가 없다. 자산관리나 유산 상속, 가업 승계 등 돈 문제에 치중할 뿐 부자철학의 제고나 가족 간 분쟁 가능성 차단 등 고차원적인 일을 도와주지 못한다. 대기업 총수는 매스컴에서나 접할 뿐 평생 만날 일은 없다. 우리 주변에서 접하는 부자는 동네부자다. 이들 부자의 불안을 덜어주고 부를 건강하게 오래 유지하게 도와주면서 자신의 터전에서 이웃에게 좋은 일 많이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패밀리 오피스의 역할이다.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부자학연구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