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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 안 보이는 유럽 위기 … ‘악마의 연금술’ 꺼내 쓰나

중앙일보 2012.07.28 00:22 종합 22면 지면보기
유럽 재정위기가 그리스에서 스페인으로 전염됐다. 사진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콜론 광장에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 뒤로 26일 벼락이 치는 모습. 스페인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마드리드 로이터=뉴시스]


20세기 초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은행가인 존 피어폰트 모건은 그것을 ‘악마의 술수’라고 했다. 20세기 최고 여성 경제학자인 영국의 조앤 로빈슨은 그것을 ‘통치자의 연금술’이라고 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일까?

국가부채의 통화화란
중앙은행이 국채 직접 사들이는 정책
정부에서 돈 찍어내는 것과 같아
돈 가치 폭락 … 인플레로 이어질 수도



 바로 국가부채의 통화화(Debt Monetization)다.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을 거치지 않고 정부로부터 곧바로 국채를 사들여 보유하는 정책이다. 정부가 찍어낸 국채가 중앙은행을 거쳐 돈(통화)으로 바뀐다. 중앙은행이 거부하지 않는 한 정부가 직접 돈을 찍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연금술인 셈이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
 물론 부작용이 만만찮다. 돈 가치가 폭락할 수 있다. 받을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금융가인 JP 모건이 ‘악마의 술수’라고 할 만하다. 통화화는 1950년대 이후 미국·유럽의 중앙은행 정책 목록에서 사라졌다.



 그 뒤 60여 년 동안 망각의 그늘에 놓여 있던 통화화가 요즘 양지로 나오고 있다. 유럽 위기 탓이다. 위기 초기엔 경제 전문가들이 먼 과거의 추억을 음미하듯 조심스레 통화화를 입에 올렸다. 그런데 최근 위기를 타개할 궁극적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유럽 상황이 모건이 말한 ‘악마’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실제 유럽 위기는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을 넘어 급기야 스페인으로 번지고 있다. 19일 이후 글로벌 채권시장에선 스페인 국채의 덤핑(투매) 사태가 이어졌다.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연 7.5% 선을 훌쩍 넘었다. 스페인으로선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금리 수준이다.



 심지어 채권 투자자들의 파업(Buyer’s Strike)이 일어날 조짐마저 보인다. 국채 수익률이 7%를 돌파해 일정 기간 흐르면 투자자들이 스페인 국채 매수를 거부하는 현상이다. 로이터통신 등은 “현재 고금리 상황이 3~4주 이어지면 투자자 파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라고 26일 전했다. 스페인이 제2의 그리스가 되는 것이다.



 영국 투자자문사인 옥스퍼드메트리카의 회장인 로리 나이트는 “스페인은 그리스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라고 말했다. 경제 규모가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4위다. 국가부채는 9396억 유로(약 1315조4400억원)에 이른다. 위기 초기인 2009년 그리스 부채보다 4배 정도 많다. 여차하면 위기가 유로존 3위 경제 대국인 이탈리아로까지 번질 태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 유로존 리더들에겐 뾰족한 정책수단이 없다. 파이낸셜타임스(FT) 표현대로 정책 병기고가 바닥난 셈이다. 구제금융펀드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과 유럽안정화기구(ESM)가 있긴 하다. 그러나 자금 규모가 스페인을 구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ECB가 나서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채를 시장에서 사들일 순 있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그렇게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ECB가 또다시 시장에서 스페인 국채를 사들이더라도 그 효과는 지난해보다 길지 않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라고 보도했다. 정책 효과의 한계체감 법칙이 작동한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쯤 되자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올 4월 대통령 선거 기간 중 입에 올렸던 통화화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당시 그는 “ECB가 통화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런 올랑드 주장을 스페인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와 이탈리아 마리오 몬티 총리가 6월 말 유럽 정상회의에서 되새김했다. 유럽의 금융 전문지인 유러머니는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이 통화화 연합전선을 구축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메르켈 독일 총리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세 사람의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로이터통신은 “메르켈이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정색하고 반대해 통화화를 두고 벌인 대화 내용이 정상회의 회의록에 기록되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메르켈이 그토록 반대한 이유는 바로 ‘인플레이션 트라우마’ 때문이다. FT 같은 외신은 “독일 국민이 1920년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뼈저린 아픔 때문에 돈의 가치 하락에 신경질적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 때문만은 아니라는 쪽이다. ‘닥터둠’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뉴욕대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국민은 빚보다 자기 자산이 많은 상태”라며 “이런 독일인들이 유로화 가치가 훼손될 수 있는 통화화를 좋아할리 없다”고 말했다. 통화화로 독일인들이 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 등에서 받을 돈의 실질 가치가 훼손되는 일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얘기다.



 요즘 독일 경제 전문가들은 앞다투어 통화의 부작용을 강조하고 있다. 통화화 논의 자체를 차단하려는 의도다. 독일의 대표적인 경제 싱크탱크인 이포(Ifo) 연구소 볼프강 에게르트 교수는 현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럽 위기의 근본 원인은 경쟁력 차이”라며 “통화화를 한다고 남유럽의 낮은 노동 생산성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에게르트 교수에 따르면 통화화는 빚진 나라의 소비를 부추길 수 있다. 유로존의 경우 채무국은 주로 남유럽 국가들이다. 이들 나라는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국이기도 하다. 결국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의 무역적자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독일 쪽 전문가들은 통화화가 이뤄지면 남유럽이 더 이상 긴축과 경제개혁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ECB를 통해 국채를 유로화로 바꾸면 빚 부담이 줄어들어 남유럽 사람들이 힘들게 개혁하려 할 의욕을 꺾을 것이란 얘기다.



 반면 통화화를 지지하는 쪽은 재정긴축 때문에 채무국 소비가 크게 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리스 아테네 경제·경영대학 니콜라스 발타스 교수는 “통화화가 남유럽보다 독일·네덜란드 등 북유럽의 내수를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통화화가 독일 국민의 소득을 늘려 소비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발타스 교수는 “독일 국민의 실질소득은 80년 이후 정체돼 있었다”며 “내수가 줄어 기업들이 수출에 매진하는 바람에 유로존 무역 불균형이 심해졌다”고 설명했다.



 양쪽의 주장만을 놓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면 역사는 어느 편일까. 세계적인 금융통화 역사가인 고(故) 글린 데이비스는 저서 『화폐의 역사(A History of Money)』에서 “20세기 통화화를 보면 한번은 비극이었고 두 번은 해피엔딩이었다”고 했다.



 그 비극은 바로 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통화가치 붕괴였다. 영국·프랑스에 지급해야 하는 전쟁 배상금을 조달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당시 중앙은행인 제국은행에 국채를 떠안겼다. 제국은행은 인쇄기를 돌려 지폐를 찍어냈다. 그 바람에 우표 한 장 값이 수백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통화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물물교환이 되살아날 정도였다.



 두 번의 해피엔딩 중 첫 번째는 미국 대공황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33년 취임 이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국채를 맡기고 달러를 끌어다 각종 투자공사 등을 설립했다. 대공황으로 작동 불능 상태인 시중은행을 대신해 기업들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돈이 돌면서 미 경제는 33년 이후 눈에 띄게 되살아났다.



 또 한 번의 해피엔딩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쟁물자를 조달해 영국뿐 아니라 소련에도 공급해야 했다. 연합국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채권을 찍어 팔려고 내놓아도 시장에는 살 만한 투자자가 없었다. 결국 FRB에 채권을 맡기고 달러를 끌어다 썼다. 덕분에 채권시장 의존도가 낮아져 금리 부담도 줄었다. 금융 역사에서 2차 대전이 ‘3% 전쟁’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미 재무부의 평균 금리 부담이 연 3%밖에 안 됐다는 얘기다. 제1차 세계대전 땐 연 5%에 달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실제 유럽의 리더들이 통화화에 합의할 수 있을까. 스티브 로치 예일대 교수는 최근 중앙일보 사공일 고문과의 대담에서 “통화화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지만 (유럽 위기의) 현실적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유럽 리더들이 결국 최종 해결책으로 통화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예상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첫 통화화의 결과는 비극일까, 아니면 해피엔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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