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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구중궁궐에 갇힌 대통령

중앙일보 2012.07.27 00:05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진국
논설실장
또 사과. 임기가 끝날 때쯤이면 여지없이 되풀이되는 대통령 사과다. 이러다 대통령에 취임할 때 아예 사과할 일정까지 잡아놔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취임 초부터 ‘사과 정치’라는 말을 들었다. 지명한 각료가 연이어 낙마한 뒤 “내가 일을 망쳐버렸다”고 사과했다. 해외 순방을 나가서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오만하고, 무시했다”며 과거 정권의 일까지 사과했다.



 그렇다면 한국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쯤이야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사과를 잘 하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알면 고칠 수 있다는 뜻이고,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사소한 정책적 착오나 실수가 아니라 불법·부패에 연루된 사건이고, 떼밀려 하는 사과라는 데 있다.



 오바마의 사과는 국민들이 좋아하지만 닉슨의 사과는 두고두고 수치로 여긴다. 사과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란 약속이다. 정권마다 판박이로 반복되는 사과, 떼밀려 하는 사과에 정말 진심이 담겼다고 믿기는 어렵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차명계좌에 수백억원을 숨겨놓은 사실이 드러나자 스스로 “못난 노태우”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최근 사돈과의 재산 송사(訟事)를 보면 그 눈물의 사과마저 거짓이었던 셈이다. 표현이 절절하다고 진심을 담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돈을 한 푼도 안 받겠다”며 기세등등하던 대통령들이 왜 임기 말만 되면 하나같이 “억장이 무너진다”며 땅을 치고 통곡하는 걸까. 후보 때야 가족 비리를 엄벌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지만 청와대에만 들어가면 그날부터 다른 사람이 된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정치인은 “대통령이 좋아하지 않는 내용을 두 번까지는 건의할 수 있어도 계속 거절당하면서 세 번까지는 도저히 입을 못 열겠더라”고 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 취임 초 아들 현철씨를 외국에 보내라고 건의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YS는 현철씨 얘기만 꺼내면 딴청을 부렸다고 한다. YS가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건 듣기 싫다는 뜻이다. 아들에 대해 좋지 않은 보고를 하면 그 보고서는 곧바로 아들에게 전달됐고, 그 사람은 도청과 감시 대상이 됐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아들 얘기만 꺼내면 결단을 주저했다. 구속 직전까지도 “돈을 받은 일이 없다”는 아들의 해명을 믿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고생시켰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다. 성역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도 형님을 외국에 보내라는 건의를 수없이 받았다. 대통령마다 “나는 다르다”고 자신하지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다. 결국 가족과 측근 문제는 대통령 본인의 문제다.



 청와대에서 고위 참모를 지낸 한 인사는 “퇴임하고 사저(私邸)로 돌아가 옛날 쓰던 침대에 누워 첫날 밤을 보낸 뒤에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된다”고 말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한 참모는 퇴임 1년 전 “앞으로 험한 길을 갈 각오를 하셔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러자 노 전 대통령은 “왜 겁을 주느냐”며 역정을 내고 들은 척도 않더라고 한다.



 막상 YS가 취임사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정부패의 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코 성역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외치는 걸 TV로 듣자 들고 있던 수저를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때서야 실감을 한 것이다.



 레임덕의 가장 큰 문제는 권력 공백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귀신도 모르게 외환위기를 당한 것도 바로 이때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하면서 “사이후이(死而後已·죽어서야 그칠 정도로 노력한다)의 각오로 더 성심을 다해 일하겠다”고 말한 것은 다행이다.



 그런데 요즘 관가(官街)에서 유행한다는 ‘남행열차’라는 건배사는 알고 계실까. ‘남 다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해서 차기 정권에서도 살아남자’는 뜻이라고 한다. 이 대통령도 18일 학생들에게 “근데 (요즘 같아서는 사람들이) 청와대에 지원하려나 모르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은 것 같다. 세계적 경제위기, 치열한 국제경쟁 시대에 5년마다 1년 이상 레임덕으로 허송세월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권력 공백기를 피하려면 본인과 측근을 경계하는 게 기본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것도 방법이다.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대통령을 구중궁궐에서 탈출시키는 일이다.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청와대에서 무슨 소통이 되겠는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밖에 없다. 구중궁궐에서 나와 귀를 열고, 다음에는 수시로 참모와 토론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그래야 등 떠밀려 사과하는 불행의 악순환을 끝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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