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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금융이 장단 넣으니 … 일본 경제, 조심스레 어깨춤

중앙일보 2012.07.24 00:26 경제 4면 지면보기
일본 경제가 모처럼 어깨를 펴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이 불황의 터널로 빠져들고, 중국까지 흔들리는 와중에 일본은 자신감을 되찾는 모습이다. 1990년 버블 붕괴 이후 20여 년간의 구조조정을 거치며 체력을 보강한 일본의 은행·증권회사들이 상대적인 경쟁력 우위를 바탕으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풍부한 내부 유보 현금을 바탕으로 해외 기업사냥에 다시 나서고 있다.


경제 부활 열쇠 쥔 금융의 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23일 금융산업의 상대적인 우위 덕분에 일본 경제가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특집으로 보도했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도 ‘일본 기업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실었다.



 ‘세계가 일본을 다시 주목한다’는 제목의 니혼게이자이 기사에 따르면 일본 재계와 금융계는 현재 일본 경제가 마지막 부활 기회를 맞이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 저력은 탄탄하고 안정적인 금융의 힘에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유럽과 미국의 금융산업이 쑥대밭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강력해진 일본 금융의 힘을 잘 활용하면 일본 경제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지난 3월 이탈리아의 마리오 몬티 총리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이런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몬티 총리는 주요 은행·증권회사의 경영진을 만나 “이탈리아 국채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세계 각국의 투자자들이 유럽에서 자금을 빼내고 있는 가운데 이탈리아가 의존할 협력 파트너로 일본에 손을 내민 것이다.



 일본 은행의 존재감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버블 붕괴 이후 20년 넘게 지속해 온 부실정리와 자본확충 등 혹독한 구조조정의 결과다. 일본 은행들은 버블경제 이후 거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불량 채권을 꾸준히 청소했다. 이 덕분에 은행 신용등급은 어느새 세계 금융시장의 우등생 반열에 올랐다. 최근에는 다시 해외 시장 진출도 활발해졌다. 일부 대형 은행은 국제금융시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미쓰비시UFJ, 미쓰이스미토모, 미즈호 등 일본의 3대 은행그룹은 기업이 대형 투자에 이용하는 국제적 협조융자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 은행은 이 분야에서 올 상반기 세계 랭킹 10위 안에 모두 들어갔다.



 일본 은행들이 부활의 날갯짓을 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도 일본 시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넷전화 스카이프를 창업한 니클라스 젠스트롬은 “현재 가장 눈에 띄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도쿄의 번역업 벤처 ‘겐고’에 투자해 수시로 일본을 찾고 있다. 미국 투자 회사 리버사이드 파트너스의 최고경영자(CEO) 스튜어트 콜도는 6월에 일본을 방문해 “탁월한 기술력의 기업이 대거 포진한 일본은 보물섬”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평가의 원천은 일본 경제의 탄탄한 버팀목으로 변신한 금융업 덕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20년간(1992~2012년 6월 말) 일본의 닛케이평균 주가지수는 40%가량 하락했다. 하지만 조사 대상 884개 상장기업 중 20%는 주가가 오히려 상승했다. 이 가운데 히사미쓰(久光) 제약·유니참 등 54개사의 주가는 2배 이상이 뛰었다. 첨단 기술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면서 난국을 극복했다.



 일본 경제의 구조적인 약점으로 통하는 ‘고령화’ 문제도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되고 있다. 은퇴자들이 갖고 있는 알짜 자산을 활용하면 정비된 금융인프라와 함께 금융 활성화의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형 자산운용회사 블랙록의 아태 회장 마크 매콤은 “세계적인 장수국인 일본에서 리스크 자산에 대한 투자가 앞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본의 1500조 엔 개인 금융자산의 80%는 50세 이상이 보유 중이다.



 18세기 스위스에서 창업한 명문 은행 론바 오디에는 최근 시즈오카(靜岡)은행 등 유력 지방은행과 잇따라 제휴했다. 일본 각지 장수 기업의 사업 계승이나 창업가의 자산관리를 담당하는 프라이빗뱅킹 업무에 손을 뻗치기 위해서다. 일본에는 양조·과자·공예품 등 창업한 지 200년 이상 된 기업이 3900여 개에 달한다. 이는 독일(1800)·영국(460)을 웃돌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일본 기업의 경쟁력은 역설적으로 먼저 경제위기를 거쳤기 때문에 확보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유럽 따라잡기에 급급했던 일본은 고도성장에 따른 버블의 생성과 붕괴를 거치면서 큰 교훈을 얻었다. 실력을 벗어나 너무 앞서가지 않으면서 자국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꿰뚫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 장단점을 확인한 만큼 일본 경제의 회생 가능성도 커졌다는 분석이다.



 일본에서는 차제에 도쿄를 세계의 금융 센터로 만들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달 초 도쿄대가 개최한 ‘자본주의를 되묻는다’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요시카와 히로시(吉川洋) 교수는 “금융은 산업의 기초 없이 이루어지는 업종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산업이나 기업이 있어야 금융업도 이런 업종에 자금을 공급해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요시카와 교수는 “성장 분야에 돈을 굴리지 않는 금융은 심각한 버블을 일으킬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유럽에서는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로 금융기관의 신용이 심대한 상처를 입었다. 월스트리트는 불신의 시선을 받고 있다. 반면 일본에는 서구 금융시장과 같은 불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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