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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국정원, ‘동네 정보원’이 되는가

중앙일보 2012.07.24 00:49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철호
논설위원
국가정보원은 한때 ‘아시아 최강’의 대접을 받았다.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 비서를 망명시켰고, 장승길 이집트 대사를 미국으로 빼냈다. 빛나던 시절이었다. 요즘 그런 조직의 대북 더듬이가 영 시원치 않은 느낌이다.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정보는 탈북자 인터넷 사이트에 선수를 빼앗겼다. 김정은 후계자 지명도 외신 보도보다 한참 늦게 확인했다. 지난해엔 인도네시아 특사의 호텔방에 잠입했다 망신을 당했으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도 까맣게 몰랐다. 오죽하면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입에서 “막대한 돈을 쓰고도 ‘동네 정보원’이란 말을 듣느냐”며 문책 요구가 나왔을까.



 올해 북한 정황은 어느 때보다 예민한 시기다. 그럼에도 국정원의 헛발질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영호 북한 총참모장이 숙청됐을 때, 국정원은 또 몰랐다. 김정은 제1비서의 부인으로 여겨지는 여성이 연일 TV 화면을 누비는데, 국정원은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다. 혹시 두어 달 전 원세훈 국정원장의 “김 제1비서는 아직 결혼한 적이 없다”는 장담이 부담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이제는 온 나라가 북한의 ‘낚시질’에 당하는 판이다. 지난 18일 북한이 ‘중대 보도’를 예고하자 증시에선 대북 테마주들이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대북 정보가 깜깜해지면서 작전 세력들만 살판난 것이다.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발언 수위는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엔 “통일은 도둑같이 온다”고 했다가 얼마 전에는 “노을을 보고 해가 지는 것을 알 수 있듯이 통일은 정말 가까이 왔다”고 강조했다. 국정원의 정보에 따른 게 틀림없다. 국정원은 최근 북한 동향을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군부 내 소장파들을 결집시켜 돌출행동과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대북 인간정보(휴민트)에 따른 자신감일 수 있다. 일부 언론이 “이 총참모장 체포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있었다”고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감청 등 대북 기술정보(테킨트)가 더 풍부한 합참 측은 이를 부인했다. 정승조 합참의장은 “지금까지 북한 내부의 특이 동향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런 상반된 관측은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북한의 내부 충돌 징후가 짙으면 가만히 지켜보는 게 최선이다. 거꾸로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안착하고 선군(先軍)에서 선경(先經)으로 노선을 바꾼다면 남쪽에서 적극 손을 내밀 때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교통정리를 해야 할 당국끼리 혼선을 빚으면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하다. 참고로 대북 민간 전문가들은 국정원과 달리 후자의 입장에 서는 분위기다.



 더 큰 문제는 정보전쟁의 실패가 정치적 공방으로 변질되는 데 있다. 야당은 “현 정부가 잦은 인사와 조직개편으로 국정원을 정보행정기관으로 전락시켰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여당은 “김대중 정부가 대북 전문인력 581명을 ‘학살’한 게 원죄”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양쪽 다 공범(共犯)이다. 대선 때면 국정원의 줄서기가 반복됐고, 정권이 교체되면 항상 개혁의 도마에 올랐다. “진짜 베테랑 요원들은 다 정보학교나 지방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냉소가 뜬금없는 게 아니다. 여야가 정말 국정원을 되살리려면 대선 후보들부터 “집권하면 결코 정보기관을 사적(私的)으로 쓰지 않겠다”고 공약하는 게 우선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국정원을 치열한 첩보조직이 아니라 이벤트 회사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젊은 네티즌들은 국정원이 유해 사이트를 신고할 때 나눠주는 ‘절대 시계’ ‘절대 손톱깎이’를 받는 놀이에 푹 빠져 있다. 정치권도 국정원의 정보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북한에 대형 사태가 꼬리를 무는 데도 국회는 국정원장을 불러 긴급 정보위를 열 기미가 없다. 무엇보다 뼈아픈 대목은 북한의 반응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국가보안법 폐지, 국정원 해체’를 요구하며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국정원 해체’라는 구호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만큼 만만해진 것일까. 이 대통령의 표현처럼 ‘도둑’이든 ‘노을’이든, 통일을 앞당기는 최선봉에 서지 않는 한 ‘동네 정보원’이란 비아냥은 쉽게 사그라질 것 같지 않다.





바로잡습니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김 제1비서는 아직 결혼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 국정원 측이 알려와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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