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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민의 이름

중앙일보 2012.07.23 00:02 종합 39면 지면보기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우리는 시(時)를 하나·둘·셋…의 순수한 우리말로, 분(分)을 일·이·삼…의 한자어로 나타낸다. ‘열시 십분’이지 ‘열시 열분’이나 ‘십시 십분’이 아니다. 외국인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이다. 우리말은 어휘 자원이 풍부하다. 어휘가 많을수록 표현이 정확하고 섬세하다. 그래서 대상과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말을 골라 써야 한다. ‘새빨간 거짓말’은 바른 표현이지만 ‘시뻘건 거짓말’은 생뚱맞다.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웅변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명쾌하게 집어냈다. 그러나 국민(people)의 뜻은 정치이념에 따라 다르다. 대한민국에서는 나라의 주권자지만, 세습독재의 북한에서는 신민(臣民)이나 다름없는 인민이다. 봉건왕국에서는 힘 없는 백성이고, 식민지에서는 저항의 민족이며, 공산체제에서는 무산대중(無産大衆)인 민중이다. people이라는 단어 하나를 우리말은 국민·인민·백성·민족·민중 등 다양한 의미로 분석해 낸다.



 바야흐로 국민 전성시대다. 국민배우·국민가수·국민오락에 국민여동생까지 생겨났다. 지난 정권에서는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구호도 나왔다.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헌법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립 서비스였다. 국민은 위임인인 주권자요 대통령은 수임인인 공복(公僕)이기 때문이다. 헌법 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의 지위는 헌법수호기관인 대통령보다 우월하다. 그것이 헌법정신이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구호는 국민을 높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국민의 지위를 강등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민이 시장’이라는 짝퉁 구호도 마찬가지다. 시민은 시장을 부리는 주인이지 일꾼이 아니다.



 여야의 대선 후보들마다 국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여당이 믿는 국민과 야당이 기대는 국민이 따로 있다. 한쪽에서는 국민의 이름으로 찬성하고, 다른 쪽에서는 국민의 이름으로 결사 반대한다. 국민의 이름을 팔아 정파의 이익을 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홍위병들은 중국 인민의 이름으로 문화혁명이라는 반문화적 광란극을 벌였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우민(愚民)정치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고다.



 개인이라면 “왜 내 이름을 팔고 다니느냐”며 항의할 수도 있으련만, 국민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것에는 어찌 항의해 볼 도리가 없다. 국민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매번 국민투표를 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정작 이름의 주인인 국민은 눈 멀뚱멀뚱 뜬 채 이름을 도둑맞아야 하는 서러운 신세가 아닌가.



 국민을 보는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나라의 주권자로 섬기는 민주정치인, 옛적의 백성쯤으로 얕잡아 보는 독선가(獨善家), 선동과 정치공작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포퓰리스트, 계급투쟁의 돌격대로 내모는 마르크시스트…, 이들이 한데 뒤섞여 국민이라는 말을 분별없이 쏟아내고 있다. 우리말의 뛰어난 분석력도 정치판에서는 도통 힘을 쓰지 못한다.



 ‘국민경선’을 내건 정당들이 당내 선거에서 대리투표·공개투표·집단투표 등 온갖 불법을 저지른 혐의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국민의 이름으로 자행된 부정선거라니, 국민을 우습게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깔보고 업신여기는 반민주적 작태다. 하기야 국회 개원식에서 국가를 제창하는 국회의원의 모습이 신기한 뉴스거리가 되고, 정권 말기만 되면 어김없이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검찰청 포토라인에 등장하는가 하면,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공약한 국회의원들이 동료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냉큼 부결시켜버리는, 하늘 아래 둘도 없을 엽기(獵奇)의 정치판임에랴.



 국민의 편을 갈라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던 정파들이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오자 국민통합을 말하기 시작했다. 시장경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던 성장론자들이 언제부턴가 경제민주화를 부르짖고, 무상복지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분배론자들이 슬그머니 성장담론을 입에 올린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내팽개친 입발림의 표심(票心) 낚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민주헌정의 윤리를 선명하게 밝힌 링컨의 이 명언에는 국민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다. 헌법정신에 투철한 정치인의 신념이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의 품위와 절제는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풍부한 어휘, 우수한 표현력을 지닌 나라말을 가지고도 그저 사나운 막말과 욕설, 비방과 선동밖에 뱉어낼 것이 없는 정치꾼들에게 기대할 바는 아니겠지만…. 제헌절이 어언 64주년이건만, 국민의 이름은 마냥 서럽기만 하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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