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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 강요하던 교회권력에 범신론으로 맞서

중앙선데이 2012.07.22 00:24 280호 28면 지면보기
인류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종교는 3대 유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다.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십 수세기에 걸쳐 서로 대결과 갈등만 키워왔다. 배타성이 강한 유일신교는 특유의 역동성으로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등 분야의 지속적 발전을 가져왔다. 반면 이들 간 정통성 다툼은 인류를 숱한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범신론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중세기 교권은 세속 군주를 압도하는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 14∼16세기 르네상스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전통 교권은 다소 약화됐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핵심 권력이었다. 그래서 당시 서구사회의 진리인 유일신 교리를 부정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는 신의 존재를 달리 해석하는 논리를 펴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로부터 배척받았다.

부모는 유대교 지키려 네덜란드행
스피노자는 1632년 신교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포르투갈 태생 유대인이다. 15세기 말 종교재판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의 아랍인·유대인이 추방됐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은 750년간 지속된 아랍 지배를 종식시키고 이 지역을 기독교 청정지역으로 환원시키려 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개종을 명했다. 극소수 유대인은 생존을 위해 형식적으로만 개종했다. ‘마라노’ 유대인이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 터키, 프랑스 남부, 네덜란드로 갔다. 스피노자의 가계도 이런 배경에서 신앙의 자유를 택해 당시 유대인에게 가장 관대했던 네덜란드로 옮긴 것이다.

총명한 스피노자는 유년시절부터 공부를 좋아했다. 5세 때부터 히브리어, 토라, 탈무드, 유대철학을 공부했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신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카발라는 토라 등 유대교 전통 경전을 심층 분석하고 우주의 신비와 접목시켜 과학연구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카발라엔 비전(秘典)인 ‘조하르’가 있다.

스피노자는 원래 랍비(유대교 성직자)를 지망했다. 언어에도 재주가 있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도 배웠다. 자신의 이름도 포르투갈어 벤토나 히브리어 바뤼흐 대신 라틴어 베네딕투스를 주로 사용했다. 라틴어와 기독교를 연구하던 스피노자는 점차 유대교 교의(敎義)에 회의를 느꼈다. 또 동세대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주체철학 중 존재론을 받아들였다. 다만 그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신의 초인성, 영육의 2원성 등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의 무한우주론을 발전시켜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을 정립했다. 브루노는 신격을 부정해 종교재판 후 화형을 당한 인물이었다.

네덜란드 유대교단은 스피노자가 유대교 교리에 반하는 연구를 계속하자 1656년 그를 신성모독죄로 파문했다. 파문 후 한동안 암살 위협에도 시달렸다. 외톨이가 된 그는 생계수단으로 안경, 현미경, 망원경 등의 렌즈를 깎는 일을 했다. 주변 지인들이 십시일반 도와주긴 했지만 생활은 옹색했다. 고독하고 빈한한 생활 여건 속에서 그는 오로지 철학적 진리 추구에 몰두했다. 1670년 덴하흐(헤이그)에 정착했다. 167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독자적인 연구를 더 원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범신론을 통해 무한한 신적 존재는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했다. 신을 우주와 대자연의 내재적 원인으로 보았다. 인격체의 신이 아닌 자연으로서의 신을 긍정했다. 신의 본성인 자유로운 신앙이 아닌 맹목적 복종을 강요하는 교회체제의 신을 부정했다. 교회가 사랑과 자비의 신이 아닌 속박, 심판, 처벌하는 인간화된 신으로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유일신교의 교리로 보면 신과 자연을 동격에 놓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스피노자는 기독교 신이 행하는 이적을 인정치 않았으며 이를 빙자해 신자를 회유하고 위협하는 기성 종교의 실체도 규명하려 했다. 그는 분명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게 이단이었다.

스피노자는 평생 몇 권의 저술을 남겼다. ‘신학정치론’, ‘지성정화론’, ‘데카르트철학의 제원리’ 그리고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된 윤리학’ 등이다.

안경알 깎으며 연명, 진폐증으로 숨져
평생 독신으로 지낸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안경알을 깎다 들이마신 유리가루가 폐에 쌓여 1677년 진폐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덴하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사후 100여 년 동안 그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혹독했다. 독일 문인 괴테와 레싱만은 스피노자를 사상적으로 앞서간 인물로 평가했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이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이 말은 스피노자의 발언으로 알려졌다. 우주, 세계, 시간은 하나이므로 시작과 종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란 말뜻 해석이 있다.

평생 교단과 학계로부터 배척받은 스피노자의 철학 이론은 후일 많은 선각자에게 전수됐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디드로 그리고 독일 철학자 헤겔 등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독일 관념주의 그리고 세계사의 큰 변혁을 가져온 계몽주의와 사회주의에 투영됐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종교문제 거론은 금기에 속한다. 금기란 아픈 자에 대한 배려로 묶은 사회적 합의다. 그런데 이 금기가 사회의 보호와 침묵 속에서 간혹 배타적 권력으로 발전한다. 자유인 스피노자는 신을 공포적 존재로 부각시켜 신도를 위협과 보상으로 회유해 맹신을 강요한 당대 교회권력에 저항했다. 지금도 하기 어려운 기성 종교권력에 맞서는 커다란 용기를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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