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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세우고 10년, 나만의 시간 단 1초도 없었다

중앙선데이 2012.07.15 01:38 279호 12면 지면보기
셰이카 데야 공주는 한국 기업에 인내심과 현지화를 주문했다. “사업이 조금 안 된다고 금방 철수해버리면 신뢰도 빨리 잃는다”는 조언이다. 전수진 기자
“난 내가 공주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바레인 왕족인 셰이카 데야 빈 이브라힘 알칼리파(39) 공주의 진심 어린 고백이다. 셰이카 데야 공주는 바레인 왕실기업인 리야다그룹(Riyada Group) 창업주이자 대표다. 고속철도 및 제주도 투자 가능성 타진차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9일 서울 소공동에서 중앙SUNDAY와 만난 셰이카 데야 공주는 명확한 영국식 영어로 세련된 농담을 섞어 가며 대화를 이끌었다. 인터뷰 자리엔 잘 손질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꽃무늬 재킷에 무릎 길이 스커트를 입고 나왔다. 중동 여성의 전형적 차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레인은 중동 국가 중에서도 여성에게 덜 보수적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중동 지역 최초로 2002년부터 여성도 남성과 같은 수준의 투표권·참정권을 획득했다.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한 최고여성위원회도 구성돼 있다.

사업차 한국 온 셰이카 데야 사우디아라비아 공주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으로 태어난 셰이카 데야 공주는 바레인 왕실로 시집간 친언니를 따라 바레인으로 이주했다. 언니 사비카 왕비는 바레인 왕실의 대를 이을 왕세자를 낳았고, 셰이카 데야 공주는 왕세자의 친이모로 왕실 내 입지가 탄탄하다. 셰이카 데야 공주에게도 ‘전하(Her Highness)’라는 왕족 칭호가 붙는다. 하지만 그는 기자에게 “때론 그 칭호가 거추장스럽다”고 털어놨다.

“난 공주이기 전에 인간이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해 얻어 낸 능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편한 삶을 마다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명문 런던정경대(LSE)를 졸업한 배경이기도 하다. 셰이카 데야 공주는 졸업 후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언스트앤영 런던사무소의 인수합병(M&A) 및 전략경영 파트에서 5년을 근무했다.

그곳에서 경력을 쌓은 뒤 셰이카 데야 공주는 바레인으로 돌아와 리야다그룹을 세웠다. 이 회사의 회장은 그의 친언니인 사비카 왕비가 맡고 있다. 리야다그룹은 컨설팅·투자·보험·통신 및 석유·가스 개발 등에서 세를 확장하며 승승장구 중이다. 셰이카 데야 공주의 결혼 여부에 대해 묻자 리야다그룹 관계자로부터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라는 아리송한 답변이 돌아왔다.

리야다그룹이 밝힌 연 매출액은 10억 달러(약 1조1150억원)에 달한다. 세계 38개국에서 25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주요 활동 무대는 중동 걸프만 및 북아프리카, 러시아 연방 및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이다. 지난해엔 한국에도 지사를 내고 사업 반경을 아시아로 넓히고 있다. 이번 방한 역시 고속철도사업 및 제주도 투자 등 여러 사업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서라고 그룹 관계자는 밝혔다.

이미 구체적으로 추진 중인 사업도 있다. 지난달 코레일·한국철도시설공단·포스코건설·쌍용건설 등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지하철 건설사업 입찰에 참여했다. 10여 개 컨소시엄이 경쟁하는 이 사업은 총공사 규모가 260억 달러(약 29조원)에 이른다.

또 지난 4월엔 제주도에 의료휴양시설을 짓는 프로젝트 관련 양해각서를 제주도 측과 체결하기도 했다. 이번 방한 일정에 제주도 방문이 들어 있던 이유다. 우근민 제주도지사의 초청이다. 셰이카 데야 공주는 두 프로젝트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엔 이르다”면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한국 기업을 택한 이유는.
“각 분야 전문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큰 관심을 갖는 해수 담수화 사업부터 고속철도·지하철 같은 인프라 건설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업은 여러 의미에서 중동 기업에 벤치마킹 대상이다. 세계 각국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내가 봐도 한국 기업은 다른 나라 기업과 비교해 경쟁력이 있다. 훌륭한 한국 기업이 너무 많아 지금 모두 언급하려면 인터뷰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릴 텐데 괜찮은가(웃음).”

-사우디 리야드 지하철 사업자 선정에 있어 한국 기업들로만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한국 기업만 갖는 특별한 강점이 뭔가.
“한국 기업 저력의 핵심엔 연구개발(R&D) 투자가 있는 듯하다. 이 점이 중동과 한국 기업의 시너지가 극대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동 국가들이 가장 중시하는 건 기술 이전 가능성이다. 사업자로 선정한 기업이 자사의 기술을 얼마나 공유할 준비가 돼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한국 기업은 중동에 상당히 매력적이다. 과거 중동에서 한국 기업의 활약이 워낙 인상적이기도 했고. 또 한국이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역사에서도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앞으로 중동 지역과 한국 기업과의 협력 전망을 진단해 본다면.
“페르시아만 연안 산유국이 결성한 걸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GCC) 지역 국가들은 한국 기업엔 기회의 땅과 같다. 이번 사우디 리야드 지하철 건설사업은 시작에 불과하다. 사우디뿐 아니라 카타르·바레인 등이 곧 철도·전기 등 각종 인프라 건설에 박차를 가할 거다. 오일머니 의존도를 낮춰 가는 것이 GCC 국가의 주요 어젠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프라는 물론 교육·건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투자가 이뤄질 태세다. 생산이 아닌 소비에 치중해 온 지금까지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다. 경쟁은 이미 치열하다. 한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의 기업들, 또한 다국적 기업들이 중동 지역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 기업이 염두에 둬야 하는 점은.
“사업자로 선정되기까진 인내심과 적극성을 발휘해야 한다. 성급하게 성과를 내려고 무리하면 안 된다. 먼저 해당 국가에 사무소를 내고, 현지인을 고용하고 네트워크를 쌓는 노력을 보여 줘야 한다.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건 당연하다. 현지화 노력이 선행돼야 GCC 국가들은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된다. 사무소를 냈는데 일정 기간 성과가 없다고 혹은 중동 지역 경제에 단기 위기가 온다고 바로 철수해 버린다면? 한국 기업의 신뢰를 함께 버리는 셈이다. 천천히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글로벌한 시각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공주 본인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한 가지 예를 들자면 2년 전부터 러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러시아 관련 사업에 박차를 더욱 가하기 위해서다. 좀처럼 늘지 않아 고민이긴 하다(웃음). 내가 직접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아도 러시아 사업을 벌일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 언어를 구사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그 나라 문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여성사업가로 살기가 어떤가.
“여자가 아니라 사업가라면 모두 다 힘들다. 리야다그룹을 창립하고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만의 시간은 하나도 없었다. 24시간을 모두 사업에 쏟아부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불만은 없다. 사업이 커 나가는 걸 보는 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다.”

-중동에서 여성 권리는 신장하고 있나.
“바레인은 이미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됐다. 의과대학에도 여성들이 많고 정계에도 여성의 활약이 크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전히 여성에 대해 보수적이지만 5년 전과 비교해 보면 큰 진전이 있었다. 국비장학금을 남녀 학생 모두에게 동등하게 지급한다. 매년 5000명의 학생이 이렇게 해외유학을 간다.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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