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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화 안 된 구두 통보에 묶여 스스로 180㎞ 제한

중앙선데이 2012.07.15 01:22 279호 4면 지면보기
한국의 미사일 주권 제한이 스스로 만든 것이며 문서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저자세 외교였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1979년 한ㆍ미 미사일 양해각서로 사거리가 180㎞로 제한됐고, 2001년 1월 한·미 미사일 협정으로 사거리 300㎞가 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방과학원연구소(ADD) 미사일 개발 단장 출신인 박준복(61·아래 사진)씨는 저서 한국 미사일 40년의 신화(일조각)에서 “79년에 이어 두 번째로 90년 10월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요구한 현무(미사일) 관련 사찰에 동의했다”며 “지금까지 각서를 세 차례에 걸쳐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미사일 주권 제한 과정 파헤쳐 보니

이에 대해 외교부 김태진 한·미 안보협력과장은 “한·미 간에는 90년ㆍ2001년 미사일 대화가 있었지만 양해각서나 협정에 서명한 일은 없다. 다만 사전에 서로 정리한 의견을 우리가 발표했을 뿐”이라고 했다. 90년엔 한국의 미사일 개발 현황을 미국에 ‘일방적으로’ 알려주기로 했고, 2001년엔 한국이 미사일기술수출통제체제(MTCR)에 가입할 것이며 이에 따라 사거리를 300㎞로 늘릴 수 있음을 자발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는 ‘79년 양해각서’에 대해서는 “당시 현무 미사일을 개발하려면 미국의 지원이 필요해 180㎞ 사거리로 자율 규제할 것임을 알린 것”이라며 “군 당국 간의 기술적 대화였으며 문서를 봤는지 말하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79년 12·12사태 뒤 구두로 ‘미사일 사거리 180㎞’를 당시 미국에 전한 것이며 90년엔 현무 미사일 제작을 위해 각서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방과학연구소(ADD)박준복 전 미사일 단장이 쓴 『한국 미사일 40년의 신화』 (일조각)
결국 박씨의 주장을 계기로 ▶한·미 간에 두 차례가 아닌 세 차례의 미사일 협의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미사일 주권이 침해됐고 ▶문서도 없이 ‘180㎞ 사거리’ 구두 통보를 근거로 한국은 20여 년 동안 사거리 제약을 받았음이 공개된 것이다. 박씨는 “문서에 서명을 했든 안 했든 현장에선 180㎞에 맞춰 미사일을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또 외교부는 79년, 2001년의 한·미 미사일 문서가 네이버 백과사전에 오를 만큼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30년 넘게 이를 시정하려 들지 않았다.

한편 박씨는 79년 이후 미국의 사찰이 계속돼 왔다고 지적했다. 김태진 과장은 “사찰협정은 없으며 사찰을 받았다고 들은 적도 없다”며 “미국의 지원이 필요해 한국의 정책지침에 따라 자료 제공 등의 방식으로 미국에 투명성을 보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씨는 “79년 봄, 대전 ADD로 미국대사 일행이 대형버스 한 대와 승용차에 타고 왔던 것을 기억한다”며 “이후 계속 우리가 사찰팀이라 부른 10여 명의 미국 팀이 방문 형식으로 왔지만 그들은 브리핑 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사정없이 묻고 따졌다. 사실상 미국은 사찰단처럼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을 공개한 박씨를 12일 만났다. 그는 7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미사일 개발 명령을 내린 직후인 74년 ADD에 들어갔다. 37년간 미사일맨으로 일하다 2011년 명예퇴직한 그는 지금 신철원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어떻게 미사일 개발에 참여했나.
“74년 ADD 항공사업부의 XGM 프로젝트에서 일했다. 실험(X)용 유도 미사일(GM)을 뜻한다. 당시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홍릉의 과학기술정보센터에서 미국 맥도넬더글러스사의 유도무기 설계자료, 마틴마리에타사의 61년판 ‘미사일 형상설계’, 미 육군이 발간한 핸드북 시리즈 같은 기초적인 것들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사거리 140㎞인 미제 나이키 허큘리스미사일을 모델로 짝퉁 미사일을 만들었다. 미군 실험장에서 실험도 했다.”

-미국의 방해는 없었나.
“77년 미국의 록히드 프로펄션사에서 추진제 충전시설들을 사 왔고 도서실 자료까지 인수했다. 유도탄 시험 임무통제센터는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의 한 회사와 계약했다. 그런 걸 미국이 방해하진 않았다. 다만 추진제 기술 자체는 미국 정부의 수출 거부로 도입처가 프랑스로 바뀌었다. 또 75년 3월부터 6개월간 미 육군의 유도탄 사령부에서 교환근무를 했다. 거기서 유도탄 설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작성한 사람 바로 옆자리에서 근무했다.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미국은 바탕도 없는 한국이 미사일을 개발한다니 경계하지 않은 것 같다.”

박씨는 귀국한 뒤 ‘백곰’으로 이름이 바뀐 미사일 프로젝트에 복귀해 77년 12월 31일 원 모델의 20% 축소형인 ‘새끼 백곰’의 시험 비행을 끝냈다. 78년 9월 26일엔 안흥시험장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보는 가운데 백곰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그 뒤 미사일 개발이 곤두박질했다.
“79년 10·26으로 박 대통령이 사망했고 사거리도 180㎞로 제한됐다. 80년엔 먼저 ADD 고위층이 해직됐고 백곰 미사일 개발은 중단됐다. 백곰 미사일이 미국 미사일에 페인트만 칠한 사기라는 모함도 돌았다. 그러다 82년 가을 연구원들에게 전원 사표 제출 지시가 와서 직원의 30%인 900여 명이 쫓겨났다. 미사일 개발
조직은 완전히 해체돼 나는 다연장포 개발로 이동했다.”

그러다 아웅산 사건 직후, 84년 미사일 사업은 ‘현무 유도탄 사업’으로 부활했다. 87년 현무 미사일 부대가 탄생됐다. 90년 다시 현무 미사일 팀에 복귀한 박씨는 미국의 압박을 현장에서 느꼈다.

-어땠나.
“미국은 현무 생산에 필요한 부품 수출을 질질 끌다 89년 말엔 아예 거부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때 미사일 개발을 막은 것 말고 다시 뭘 하지 말라 하거나 조직을 없애거나 한 것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그러나 미국 위성을 의식해 보호막을 설치했고 통신 감청, 정찰 같은 것도 늘 조심했다. 동맹이라도 어쨌든 당연히 감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90년대 국방부에서 과장을 지낸 인하대 박동형 교수는 “미사일 협상 당시 로버트 아인혼 비확산 담당이 식사 자리에서 ‘미국 입장은 남북 모두 300㎞ 이상 사거리의 미사일을 보유하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협상을 하며 실랑이를 많이 벌였다”며 “미국은 별걸 다 알았다. 대전 사격장에서 시험하면 미군 헬기가 미리 떴고 구미의 LG 공장에 ‘길이 50m, 반경 3m 물체가 있었는데 이게 뭐냐’고 따졌다”고 공개했다.)

-미국의 사거리 제한으로 우리 미사일 능력이 많이 제약받나.
“연구개발까지는 아니다. 사거리를 300㎞ 이상 할 수 있는 기술도 포함된다. 기초ㆍ응용연구를 할 수 있었고 미국이 그런 것까지 규제할 수는 없다. 한국 미사일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다. 지금 순항 미사일도 대단한 실력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몇 개국 없다. 일본도 기술은 있지만 물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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