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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기 기업의 또 다른 덫 적대적 M&A 늘어난다

중앙선데이 2012.07.15 01:05 279호 1면 지면보기
#1 <최종병기 활> <써니> <완득이>는 지난해 개봉작 중 한국 영화 흥행 톱3다. 벤처캐피털인 소빅창업투자(이하 소빅창투)는 운용 중인 펀드자금을 이 세 영화에 투자해 총 50억원이 넘는 수익을 펀드 투자자들에게 나눠줬다. 지난해 11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주도 아래 1236억원 규모로 조성된 ‘글로벌콘텐트펀드’의 운용회사로 선정됐다. 펀드 운용 대가로 받는 관리보수가 연 20억여원에 달했다. 2000년 창업 후 지루한 적자터널에서 벗어나 11년 만에 제대로 수익을 내는 업체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유니온테크라는 담배필터 용지 회사가 35억원의 자금으로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사들여 49%의 지분을 모은 뒤 경영권을 요구했다. 적대적 인수합병(Merger and Acquisition·M&A)이었다. 이 회사의 박현태 대표는 경영권 방어에 나섰지만 우호지분을 36% 모으는 데 그쳤다. 결국 4월 5일 주주총회에서 소빅창투 경영권은 유니온테크에 넘어갔다.

#2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현대엘리베이터는 35.5%의 지분을 보유한 2대 주주인 스위스 쉰들러그룹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쉰들러가 회계장부 열람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낸 뒤 이야기다. 이는 적대적 M&A를 위해 공격자 측이 사전준비 차원에서 흔히 요구한다. 회사의 기밀까지 낱낱이 들여다보겠다는 뜻이다. 올해 4월 1심 재판부의 기각으로 열람이 무산됐지만 쉰들러가 상급법원에 항고한 상태다. 현대상선을 주력사로 둔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는 계열사끼리 지분을 보유해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을 보장하는 순환출자 형태다. 계열사인 현대로지스틱스와 총수 일가가 순환출자의 핵심 역할을 하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50% 넘게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의 대선 공약에서 불거지는 대로 순환출자가 금지되면 현대로지스틱스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를 팔아야 한다. 그럴 경우 현대엘리베이터의 최대주주는 쉰들러그룹이 된다.

상반기 10여개사 경영권 흔들
국내 산업계에 적대적 M&A 공포가 번지고 있다. 소빅창투·현대엘리베이터는 빙산의 일각이다. 화학원료의 일종인 계면활성제를 생산하는 동남합성은 2대 주주이자 업계 라이벌인 미원상사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미원상사그룹이 다음 달 16일 임시주총에서 자신들이 추천한 사내이사 2명을 선임 하겠다고 선언해서다. 육가공업체인 화인코리아는 참치사업으로 유명한 사조그룹의 적대적 M&A 공격을 받고 있다며 대표이사가 14일까지 17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영화배급업체인 케이디미디어는 지난해 말부터 ‘방만경영을 한다’고 주장하는 소액주주들과 경영권을 놓고 법정에서 싸우고 있다. 경영권 위협을 받은 크고 작은 국내 업체는 올 상반기 10여 곳에 달한다. 적대적 M&A는 두 얼굴을 지녔다. 무능하고 비윤리적인 경영진을 견제해 주주 이익을 키우는 순기능과 함께 잘나가는 기업의 경영권을 뒤흔들어 경영 효율을 떨어뜨리는 부작용도 있다.

적대적 M&A가 늘어난 건 유럽 재정위기로 불황의 골이 깊어진 영향이 크다. 좀 거칠게 구분하자면 주가가 떨어지고 재무상태가 나빠지는 불황기에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덜 주는 적대적(Hostile) M&A가, 그 반대인 호황기에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주는 우호적(Friendly) M&A가 횡행하는 편이다. 요즘 같은 시기엔 비즈니스를 헐값에 인수하려는 기업사냥꾼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상장사 열 곳 중 아홉은 무방비
대기업들도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여야 할 것 없이 경제민주화 선명성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대규모 기업집단(재벌)의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등의 공약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순환출자는 국내 대규모 기업집단이 적은 지분으로 기업 지배력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정재규 연구조정실장은 “순환출자는 언젠간 해소해야 하지만 갑자기 금지하면 기업주의 지배력이 약해져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에 쉽사리 노출될 수 있다. 정치권은 기업에 준비할 시간을 더 주고, 기업들은 하루빨리 방어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외국 투기자본의 적대적 M&A 공격에 몇 차례 휘말린 전력이 있다. 2003년 뉴질랜드의 자산운용사 소버린은 SK㈜(현 SK에너지) 지분 14.9%를 사들인 뒤 경영권을 요구하다 2년 만에 9000억원 넘는 차익을 남기고 철수했다. 2006년에는 미국의 대표적 기업사냥꾼 칼 아이컨이 KT&G의 주식을 매입한 뒤 경영 참여를 요구하다 배당과 주식 처분 이득을 합쳐 1500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떠났다. 이러는 동안 두 기업의 최고경영진은 회사 운영보다 경영권 방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적대적 M&A에 대해 둔감한 편이다. 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기업의 11%만 기업 정관에 적대적 M&A 방어책을 마련해 놓았다. 89%는 사실상 대책이 없다는 얘기다. 기업들만 탓할 순 없다. 현행법상 적대적 M&A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 M&A 전문 변호사인 이경훈 법무법인 이림 대표는 “우리나라 상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을 외국인에 활짝 열어젖히면서 적대적 M&A의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유리한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中·日, 해외기업 사냥 열 올려
지금도 지구촌 자본시장에선 약육강식의 M&A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금융정보업체인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올 1분기 미 M&A 시장에서 적대적 M&A에 주로 이용되는 방식인 차입매수(leveraged buyout·LBO)가 전체 M&A 거래 금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3%에 달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두 배나 되는 수치다. LBO는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인수할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권 돈을 끌어다 M&A를 하는 수법이다.

한국 경제의 동북아 경쟁자인 일본·중국은 해외 기업 M&A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의 M&A 정보업체 레코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일본 기업의 해외 M&A가 262건으로 반기 기준으로 90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구본관 일본 담당 수석연구원은 “오랜 불황으로 현금을 꽁꽁 쥔 일본 기업들이 엔고(엔화가치 상승)를 등에 업고 해외 기업의 상대적 인수가격이 싸지자 M&A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동일본 대지진 후 산업기반이 빨리 회복되지 않자 외국에 거점을 마련하려는 기업도 늘고 있다. 중국은 막강한 자금력의 국부펀드들을 앞세워 굵직한 유럽 기업들을 인수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중국 기업의 유럽 기업 M&A 금액은 582억 달러로 일본(559억 달러)보다 많았다. 같은 기간 한국(98억 달러)의 6배에 달한 것이다. 중국 가전그룹 캉자(康佳)가 한국 기업들을 제치고 웅진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웅진코웨이 인수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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