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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가, 모든 것의 최초가 어떠했는지

중앙선데이 2012.07.15 01:01 279호 27면 지면보기
필자 김갑수씨(가운데)가 친구 김정운(왼쪽)·윤광준씨와 몽골 초원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세 사람은 모두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어 자신이 하는 일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예술가에게 진정한 작품은 데뷔작 하나뿐이고 나머지 전부는 자기 복제품일 뿐이다’.
이 위대한 언명의 출전은 무엇일까. 누구나 알 만한 명저의 저작자를 들먹이면 다들 ‘그런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죄송하지만 내 말이고 내 생각이다. 데뷔 시집 이래 몇 권은 더 출간할 작품 재고가 있음에도 시집 출간을 죽어라 꺼리는 내 고집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작가나 예술가의 초기작은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10대 어린 시절 설렘의 집약본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수용자의 구미를 알아채 버린 나중 전성기 작품보다 더 흥미로운 까닭이 그것이다. 직업인, 전문가가 되기 이전 특정 분야로 발을 디뎌갈 때의 몰입이란 얼마나 열광적이고 순수한 것인지.

詩人의 음악 읽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지난주 다녀온 몽골여행은 ‘익스트림’했다. 유라시아 광대무변의 한 모퉁이를 며칠 내내 달리고 또 달렸다. 포드 산악 자동차는 엎어질 듯 구렁에 빠질 듯 길이 나 있지 않은 구릉과 평원을 위험하게 질주했다. 여행 안내자가 돼 준 철강회사 회장이 괴상한 성품이어서 그랬다. 인대가 끊어지고 어디가 부러지는 등 스스로 여섯 차례나 대수술을 해야 했던 이력답게 거칠고 험란한 미답지로만 바퀴를 몰아가는데 ‘뭐 이런 영감이 다 있나’ 하는 울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그런데 계속 음악이었다. 차 안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오페라 아리아가 흘러나왔다. 5장짜리 아리아 전집 CD를 내내 돌렸던 탓이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했던 영토의 3배를 차지했었다는 칭기즈칸의 나라. 남한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땅에서 280만 명의 인구가 5000만 마리의 가축을 키우며 사는 그 개활지에서 크게 울리는 베르디, 푸치니는 기괴하리만치 조화로웠다. 이전 견해를 수정해야겠다. 몇만 년 전 시원의 원형이 살아 있는 땅을 질주할 때는 울며불며 세속의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베리즈모 오페라 아리아가 갑이다!

몽골 바람으로 샤워하고 돌아와 다시 지하 작업실에 콕 박힌 지금은 베토벤이다. 꼭 베토벤이 아니어도 상관없겠지만 그곳에서 자꾸만 일생의 최초, 일생의 최후를 떠올렸던 정서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만큼 살가운 게 없다. 소년 베토벤은 브로드우드 같은 조그만 옛 피아노로 열심히 소나타를 습작했고 빈에 도착해 먹고사는 대책도 테레제, 요제피네, 줄리에타 같은 귀족 따님들의 피아노 레슨을 통해서였다. 베토벤의 전생은 32곡(정확히는 36곡이다)의 피아노 소나타로 추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피아노 소나타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음악이니까.

Jack Libeck
장례식에 다녀오면 한 이틀쯤 사람이 착해진다고 한다. 그래봐야 다 죽는구나 하는 무상감 때문일 것이다. 1000년 전에도 1만 년 전에도 똑같은 풍광이 틀림없을 몽골 땅 광대무변의 체험으로 모든 최초를 떠올리게 됐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그중에 첫 출간물은 작품 번호(OPUS) 2번으로 세 곡이 묶여 있다. 이렇게 표기하며 소나타 넘버링으로는 물론 1, 2, 3번이다.

그중 처음의 처음인 1번 F단조 1악장 알레그로는 똑똑 끊어 치는 스타카토로 출발하며 여러 번 반복된다. ‘똑똑똑똑 똑 또르르’. 저 소리를 악보에 적어 나갈 때의 베토벤은 어떤 상태였을까. 수없이 읽은 여러 전기물의 기억대로라면 스승 하이든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 대가를 향해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하던 오기가, 클레멘티나 솅크 같이 능란한 선배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던 몸부림이 떠오른다. 하지만 정작 아무 생각이 없었을지 모른다. 자기만의 작품을 만든다는 도취적 열광에 가득 차 날밤을 꼬박 새우고 있지 않았을까. ‘똑똑똑똑 똑 또르르’는 또 얼마나 여러 번 고치고 지우고 했을까. 예쁜 소녀들이 그 소리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얼마나 두근두근 설레고 궁금했을까.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에서 꼭 언급하고 싶은 피아니스트가 있다. 1972년생이니 이제 갓 마흔을 넘겼을 영국의 폴 루이스(Paul Lewis·작은 사진). 그처럼 베토벤이라는 괴물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된 연주자는 다시 없을 것 같다. 가볍고 낭창낭창한 루이스의 타건은 작곡가의 생애적 고난과 번민을 전혀 떠올릴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폴 루이스가 절반의 베토벤을 복원시킨 것일지 모른다. 어찌 베토벤이라고 통증뿐인 삶을 살았겠는가. 그의 삶에도 환한 웃음이, 우스꽝스러운 치기가, 쾌적한 만족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루이스는 때론 달콤하게, 때론 귀엽게 피아노를 치면서 우리가 아는 베토벤과는 다른 면모를 전해 준다.
여행의 동행자 김정운은 몽골에서도 나를 향해 “개뿔!” 소리를 연발했다. 윤광준은 “으허허허” 웃기만 했다. 나는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의 삶을 떠올렸다. 초원은 드넓었는데, 열몇 살 적이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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