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쑨원 부인, 남편 시키는 대로 이혼서류에 손도장

중앙선데이 2012.07.15 00:56 279호 29면 지면보기
남편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쑹(宋)씨 세 자매의 운명도 엇갈렸다. 항일전쟁 발발 뒤 1942년 1월 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함께한 쑹씨 세 자매. 왼쪽부터 메이링, 아이링, 칭링. [사진 김명호]
1915년 6월, 쑨원(孫文·손문)은 도쿄의 공원 구석에서 쑹칭링(宋慶齡·송경령)에게 청혼했다. 쑹칭링 22세, 쑨원 49세 때였다. 쑹칭링은 부모의 동의를 구하겠다며 상하이로 떠났다. 쑨원이 “그럴 필요 없다. 결혼은 당사자들이 결정할 일이다. 구습을 타파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역설해도 듣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8>

불쑥 나타난 딸이 쑨원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쑹자수(宋嘉樹·송가수) 부부는 진노했다. 남편 쑹자수를 한참 노려보던 니꾸이전(倪桂珍·예계진)은 쑹칭링를 붙잡고 통곡했다. “너 미쳤구나.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쑨원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몇 살인지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냐. 네 나이보다 곱절도 더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결혼까지 하고 첩도 있는 놈이다. 절대로 안 된다.” 쑹자수에게도 갖은 원망을 퍼부어댔다. “도둑놈에게 홀려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갖다 바치더니 꼴 좋다. 저 애가 다 썩어빠진 과일 맛에 취했다. 어쩔거냐.” 쑹자수는 쑹칭링을 골방에 가둬 버렸다.

상황을 파악한 쑨원은 쑹자수의 의중이 궁금했다.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빗대서 말하기 좋아하는, 마치 옆집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는 척하며 상대의 속을 떠보는, 중국인 특유의 수법을 동원했다. 쑹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칭링이 가정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더구나 그 사람은 대반역자(大叛逆者)다. 결혼까지 하려고 한다니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만한 얘기다.”

쑹자수도 절묘한 답장을 보냈다. “금시초문이다. 하늘은 물론이고, 애들이 들어도 웃을 일이다. 칭링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선생을 존경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과 선생이 하고자 하는 일을 존중한다. 대반역자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적이다. 칭링도 그런 사람을 증오한다. 뜬소문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가정이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면 나는 허락하지 않겠다. 이 점은 선생도 나와 같으리라 믿는다. 명성(名聲)은 명예(名譽)나 체면(面子)보다 중요하다.”

쑨원이 부인과 이혼하고, 쑹칭링을 취(娶)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대가 잇달았다. 쑨원은 무장 거사를 결심했을 때보다 더 단호했다. “그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다음 날 새벽에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과 천하대사를 의논했지 사사로운 가정문제는 의논하고 싶지 않다”며 일갈했다.

쑨원은 마카오에 있는 부인 루무전(盧慕貞·노모정)을 일본으로 불렀다. 문맹에 전족을 한 루무전은 쑨원의 말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이날도 남편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혼 서류에 엄지손가락을 꾹 찍고 뒤뚱거리며 마카오로 돌아갔다. 쑨원은 이 고마운 조강지처를 죽는 날까지 보살폈다.

같은 해 10월 초, 쑹칭링은 하녀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10월 24일 오후, 쑨원은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회의 중이던 혁명동지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혀를 찼다. 낄낄대는 사람도 있었다.

후일 쑹칭링은 이날의 일을 상세히 회고한 적이 있다. “쑨원이 혼자 역에 나와 있었다. 나를 서구식 주택으로 데리고 갔다. 작고 예쁜 집이었다. 일본인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도착했다고 일렀다. 다음날 아침 입회인이 될 변호사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난징의 쑨원기념관(孫中山紀念館)에 일본어로 작성된 두 사람의 결혼 서약서가 남아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중국 법률에 부합되는 정식 혼인수속을 밟는다. 앞으로 영원히 부부관계를 유지한다. 서로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 서약에 위배하는 행위를 했을 경우 법률과 사회적 제재를 받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각자의 명예를 위해 상대방을 헐뜯거나 원망해서는 안 된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