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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치마 두르고 과자 구워준 엄마, 남들은 안 믿었죠”

중앙일보 2012.07.13 03:20 Week& 8면 지면보기
오드리 헵번의 아들 션 헵번 페러. ‘오드리 헵번 리비에라 백’ 광고판 옆에 섰다.
1950~196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1929~1993). 상류사회를 꿈꾸는 아름다운 처녀 ‘홀리’(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로, 신문기자와의 일탈을 즐기는 깜찍한 공주 ‘앤’(로마의 휴일·1953)으로, 말년에는 소말리아의 굶주린 어린이 구호에 나선 ‘천사’로 대중들에게 다가왔던 그녀, 헵번의 어머니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오드리 헵번 리비에라 백’ 출시 축하차 방한한 장남 페러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전 어디서든 어머니를 만납니다. 여행을 가서 호텔방에 있을 때, 옆방에서 어머니가 나온 영화를 틀어 놓으면 그 목소리가 들리죠. 길을 걷다가도 어머니의 모습이 나온 광고판을 마주치고요. 제가 만나는 그녀는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아닌 내 ‘어머니’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장남 션 헵번 페러(52)의 회상이다. 그는 헵번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영화배우 겸 제작자 멜 페러(2008년 사망) 사이에 난 아들이다. 한때 영화 제작자였던 그는 지금은 ‘오드리 헵번 아동 재단’(이하 헵번 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헵번 재단은 최근 프랑스 브랜드 ‘S.T.듀퐁’과 ‘오드리 헵번 리비에라 백’을 만들었다. 생전 오드리 헵번이 이 브랜드에 주문 제작한 것과 같은 디자인이다. 수익금의 1%를 재단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오드리 헵번 리비에라 백’ 생산을 허락했다. 제품 출시 축하차 서울을 찾은 페러에게 ‘어머니, 오드리 헵번’을 물어봤다.





1954년 오드리 헵번이 S.T.듀퐁에 주문제작한 리비에라 백.
영화 ‘로마의 휴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헵번은 ‘사브리나’(1954), ‘퍼니 페이스’(1957), ‘마이 퍼니 레이디’(1964) 등 수많은 흥행작에 출연하며 시대를 풍미했다. 출연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은 시대의 트렌드가 됐다. 헵번은 한 시대의 패션 아이콘이었고 그 트렌드는 현재 진행형이다. S.T. 듀퐁이 브랜드 창립 140주년을 맞아 오드리 헵번의 핸드백을 복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어머니에게서 예쁘고 우아한 영화배우의 이미지를 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어머니는 1989년부터 유엔아동기금, 즉 유니세프(UNICEF) 홍보대사를 맡았죠. 대다수 유명인처럼 큰 행사에 이따금씩 참여하는 식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전 세계 아동 구호를 위해 현장을 다니며 끊임없이 노력했죠.”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헵번 재단은 유니세프가 오드리 헵번 사후에 만든 ‘오드리 헵번 기념 기금’의 후신이다. 유니세프는 기구 내에 그의 이름을 딴 기금을 따로 만들고 유지를 받들었다. 헵번 재단은 맏아들 페러와 차남 루카 도티가 헵번이 죽은 뒤 10년째 되던 2003년, 기금을 계승해 독립 재단으로 출범시킨 것이다.



“암 때문에 갑자기 돌아가셨죠. 복강가성점액종이란 희소한 암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닌 발병 직전까지도 소말리아에 아동 구호를 위해 다녀오셨어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곳의 어린이들을 위해서였죠. 그래서 대중은 여전히 오드리 헵번을 떠올릴 때 인도주의자로서의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아한 아름다움에 인도주의 정신까지. 어머니의 이미지는 재단 활동에 큰 도움이 됩니다.”



어머니 오드리 헵번과 마찬가지로 영화배우였던 아버지 멜 페러의 영향을 받았을까. 페러 이사장도 30대엔 영화 제작자 겸 프로듀서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다.



“어머닌 제가 영화 일을 하길 원치 않으셨어요. ‘그리 행복하지 않은 직업’이라고 하셨죠. 어머닌 오히려 평범한 여인의 삶을 꿈꾸셨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초등학생일 때,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면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직접 과자도 구워주셨거든요. 친구 부모님들은 그 얘길 믿지 않을 정도였죠. 그때 이미 어머닌 대스타였으니까. 하지만 어머닌 평범한 엄마이고 싶어 했어요.”



오드리 헵번은 그의 전성기 때 아들 션의 양육을 위해 배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헵번의 전성기 마지막 작품으로 불리는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가 나온 것은 1967년. 션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사람들은 날더러 배우 헵번의 인생에 걸림돌이었다고 비난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머닌 아셨어요.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것을요. 전성기를 연장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죠. 그렇지만 어머닌 가족과 함께 있길 더 원했어요. 영화배우로서의 성공보다 실패한 엄마로 살고 싶지 않단 희망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페러는 “어머니가 겪은 나치 시절의 고통이 어머니의 삶을 결정지었다”고도 했다. 1929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헵번은 네덜란드에서 자랐다. 헵번은 나치 치하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어머닌 그래서 자유를 끔찍이도 존중하고 아꼈어요. 전쟁을 일으킨 독일을 정말 싫어하셨죠. 반대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에서 어린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손을 잡아준 사람들을 늘 고마워했어요. 나중에 어머니가 유니세프 활동에 전념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 생각해요.”



오드리 헵번의 이름과 초상권 등을 사용한 상업활동은 페러 이사장과 헵번의 차남 루카 도티가 관리 중이다. 페러는 “동생과 늘 상의합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이름이 앞으로도 계속 우아함과 인도주의의 대명사로 역사에 남을까 하는 것이죠.” 그에게 “오드리 헵번의 이름이 너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웃으면서 답했다.



“상업적으로 이름을 사용하게 해달란 제안을 무수하게 받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상업적이라 반대하는 경우는 없어요. 아무리 상업적일지라도 어머니의 뜻을 기릴 수 있는 것이라면,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재단을 운영하고 어머니의 뜻을 이어갈 수 있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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