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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핵무기보다 무서운 평양어 성경

중앙일보 2012.07.09 00:59 종합 32면 지면보기
전영기
논설위원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생각의 위대함을 표현합니다. 처칠은 히틀러의 공세로 영국인이 두려움에 빠졌을 때 “대포와 요새와 무장병력에 둘러싸여 뽐내는 독재자들, 그들의 가슴속엔 두려움이 있다”는 연설로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외부에서 빗발치는 언어들과 내부에서 동요하는 생각들이 독재자를 공포에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자유의 언어와 저항의 생각이 독재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 정신을 만들어 낸다는 게 처칠의 믿음이었죠. 핵무기를 뽐내는 김정은의 북한 사회에 평양어로 번역된 성경이 전파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성경 속의 자유해방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성경의 유일신 사상에 황금 송아지 같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우상체제가 동요하지 않을까요?



 평양어 성경이 보름 전 워싱턴에서 나왔습니다. 평양사범대학에서 38년간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다 서울로 탈출한 뒤 미국에 간 김현식(80) 조지메이슨대학 교수가 번역자입니다. 평양어로 번역된 성경은 얼마나 쉽고 솔직한지! 슬쩍 한 번만 들여다봐도 한여름 빙수 맛처럼 속이 시원합니다. 우선 한국어에선 성스러운 경전이란 뜻의 성경이 평양어에선 ‘하나님의 약속’으로 번역됐습니다. (사진) 구약과 신약은 각각 ‘예수 전편’과 ‘예수 후편’으로 불리게 됐고요. 한국어 성경의 요한복음은 평양어 성경에선 ‘요한이 전한 기쁜 소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약속·기쁨·소식같이 개인적 느낌을 주는 희망의 언어들이 전면에 나선 게 평양어 성경의 특징입니다. 솔직하고 경쾌하죠.



 북한에선 50년 전 김일성의 언어혁명에 따라 사투리 사용이 금지되고, 말과 글에서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가 없어졌습니다. 평양 표준어, 즉 문화어가 탄생한 거죠. 언어학자 김현식 교수는 평양 표준어를 만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처음 성경을 보면서 “신약을 새로 나온 약으로 알고, 창세기를 창 끝의 세기로 알았다”고 한 건 무리가 아닙니다. 그동안 한국의 숱한 기독교나 천주교 선교 단체가 어렵사리 한국어 성경을 북한에 보냈는데 그걸 보고 내용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사실 현대 한국어 성경은 1911년 나온 『셩경젼셔』의 고어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자어가 너무 많고 백 년 전의 언어 규칙이 남아 있어 글쟁이로 25년을 지낸 저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니까요.



 김현식 교수가 평양어 성경 번역에 몸을 바쳐온 건 한국어 성경을 북한 사람들에게 전해도 뜻이 통하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 전한 기쁜 소식’ 몇 구절을 볼까요. “처음에 말씀이신 분이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인류의 빛이었다.” 요한복음은 같은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한자어와 옛 말투 투성이인 한국어 성경한테 당황했던 북한 사람들은 김 교수의 평양어 성경을 읽으면서 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들은 “반만년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조선의 하나님인 경애하는 수령님을 해와 달이 다하도록 우러러 모셔야 하오”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김현식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수령님을 하나님으로 모셔온 평양인 중 일부는 ‘인류의 빛이 수령님이 아니다’는 평양어 성경의 선언이 충격일 겁니다. 독재자를 공포에 몰아넣는 건 내부의 동요하는 생각들입니다. 평양의 독재자에게 평양어 성경의 선언들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 핵무기보다 무서울 수 있습니다.



 김현식 교수의 평양어 성경에 영감을 준 분은 뜻밖에도 유물론 철학자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였습니다. 황 비서는 2003년 김 교수가 예일대학 신학과 초빙교수로 갈 때 추천서를 써주면서 “우리 조국이 통일되는 길은 이제 종교적인 방법밖에 남지 않은 것 같소. 예일대에 가서 머리 좋은 교수들과 의논해 보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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