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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시시각각] 뇌물 망각증

중앙일보 2012.07.09 00:00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이명박 정권 하산(下山) 길에 벼락이 몰아치고 있다. 이상득·정두언 두 사람이 검찰에 소환된 것이다. 이들은 ‘창업 권력 3인방’ 중 2인이다. 그동안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이가 감옥으로 갔다. 처사촌, 친구, 핵심 부하, 멘토(mentor), 그리고 ‘왕’수석…. 이제 형님마저 가고 있다. 사람들은 “부인과 이재오 의원만 남았다”고 한다. 전·노·김·김·노에 이어 이(李)도 변하지 않았다. 다음 정권은 다를까.



 차기 정권이 달라지려면 유력 주자가 추상(秋霜) 같은 의지를 가져야 한다. 출마 때부터 국민에게 이를 보여야 한다. 경선 권력 팀에는 강하게 경고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뇌물이란 유령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박근혜는 2억원 뇌물 전과자 김종인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내세웠다. 이는 새 시대를 바라는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4·11 총선에서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이는 박근혜의 실력만으로 된 게 아니다. ‘역사를 바꾼 막말 돼지’ 김용민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15석이 날아갔다고 민주당 사람들은 말한다. 그가 없었다면 새누리 137석, 민주당 142석이라는 것이다. 우발적인 요인으로 간신히 살아났는데도 박근혜는 오만에 빠진 것 같다. 참패했다면 거액 뇌물 전과자를 얼굴로 내세웠을까. 아니다. 아마 깨끗하고 참신한 개혁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을 것이다.



 김종인의 뇌물은 중대한 사건이다. 1992년 그는 노태우 대통령의 경제수석이었다. 경제수석은 재벌과 은행의 투명 경영을 유도해야 하는 자리다. 그런 사람이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았다. 20년 동안 금값은 6.5배 올랐다. 금값에 맞추면 당시 2억원은 지금 13억원이다. 이상득 전 의원이 받은 돈의 거의 두 배다. 김종인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김종인 경제수석은 노태우 대통령의 4000억원 비자금 조성에도 깊이 관여했다. 대통령과 재벌 사이에서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96년 그는 이원조·금진호와 함께 ‘비자금 3인방’으로 사법처리됐다. 징역 2년6개월(집행유예)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박근혜 재벌개혁’의 선봉장으로 나서고 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개혁한다는 건가. 그가 개혁하겠다는 재벌과 그는 20년 전 ‘돈의 춤’을 추었다. 20년이면 모든 게 사라지나. 이게 박근혜의 원칙인가.



 김종인을 보면서 많은 이가 물을 것이다. 박근혜가 그렇게 비판하는 이명박 정권에서는 1억원도 줄줄이 감옥에 갔다. 그런데 13억원 뇌물이 괜찮다는 것인가. 사면·복권만 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면 부패 관리·재벌은 사면·복권하지 않겠다고 공약할 거라 한다. ‘잘못된 사면·복권’의 대표적인 케이스를 중용한다면 이 말이 먹힐까. 위장전입을 많이 한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외친 것과 뭐가 다른가.



 부인 비리로 전직 국가원수가 자살하고, 친인척 부정 때문에 대통령마다 피눈물을 흘려도 이 나라는 달라지는 게 없다. 저축은행 업자로부터 수억원을 받은 6선 의원 대통령 형님이 정권의 실세였다. 청와대 비서실장 때 1억원의 뇌물을 받아 감옥에 갔던 이가 제1 야당 원내대표다. 그리고 이제는 대통령 경제수석 때 거액을 받은 이가 차기 대통령 1순위의 오른팔이 되고 있다.



 이 나라는 심각한 망각증을 앓고 있다. 국민 자체가 과거를 잘 잊어버린다. 정치 지도자는 그런 국민에게 사면이라는 마취제까지 쓴다. 비리 권력자는 사면으로 다시 살아난다. 노태우의 박철언은 국회의원이 됐고, 김영삼의 김현철은 쉴새 없이 국회 문을 두드린다. 김대중의 박지원은 제1 야당 원내대표가 됐고, 노무현이 사면한 이석기는 대표적인 종북(從北) 의원이 됐다. 이제는 노태우의 김종인이 20년 만에 다시 권력자가 될 판이다.



 박근혜는 6개월 전 2억(지금은 13억)원의 뇌물 전과자를 비대위 2인자로 썼다. 선거 승리에 취해 박근혜는 철 지난 외투를 계속 입고 있다. 그에겐 그렇게 옷이 없는가. ‘백마를 탄 개혁의 왕자’는 정말 없나.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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