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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송곳처럼 파고들어 물처럼 어루만져라

중앙선데이 2012.07.08 02:39 278호 4면 지면보기
요즘 인터넷에선 민주통합당 손학규 고문의 대선 슬로건인 ‘저녁이 있는 삶’을 놓고 논쟁이 뜨겁다. 야구 전문 사이트 mlbpark엔 “사실 저녁이 있는 삶은 당연한 것”이란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다. 증권사를 다니다 지금은 해외에서 일한다는 네티즌은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야근을 대부분의 한국 직장인들은 하고 있는 걸까. 이제 우리가 빼앗긴 저녁을 다시 찾아와야 할 시기”라고 적었다. 하지만 또 다른 네티즌은 “저녁 있는 삶이란 웃기는 구호다. 기업들한테 ‘저녁 있는 삶을 하자’고 하면 ‘알겠습니다’, 이럴 것 같은가. 사회적 합의가 우선인데 민주당은 이상주의자들만 모아놓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진화하는 대선 슬로건

슬로건이 단순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정치인들의 슬로건 글자 수는 줄어드는 추세인데 논쟁은 많아졌고, 토론을 거치며 의미는 풍부해진다.

옛날엔 형식미에 치중했다. 우선 8글자나 16글자로 대구(對句)를 이루는 표어 형식의 슬로건이 많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2대 대선, 여당), ‘죽나사나 결판내자’(4대 대선, 야당),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7대 대선, 야당) 등이 대표적이다. 슬로건이 표어 형식을 벗어난 건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13대 대선부터다. 여당 노태우 후보의 ‘보통 사람, 이제는 안정입니다’와 야당의 ‘군정종식’이란 4글자 슬로건이 맞섰다. 이후 14대·15대 대선에선 각각 ‘신한국 창조’(여당), ‘든든해요 김대중’(야당)이 나와 표현 양식에 변화가 왔다. 최근엔 ‘스마트 정치’처럼 영어 단어를 쓰는 것도 금기 사항이 아니다.

내용적으론 점차 국민이 우선시되는 탈권위주의의 변화가 나타났다. 예전엔 ‘트집 마라 건설이다’(4대 대선, 여당)처럼 명령조 어투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꿉시다’(14대 대선, 야당)처럼 존대 말투 슬로건이 등장했다. 관점도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뿌리 뽑자’(6대 대선, 야당)와 같은 거대 담론에서 ‘국민 성공시대’(17대 대선, 이명박)나 ‘가족이 행복한 나라’(17대 대선, 정동영)처럼 국민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올해 민주통합당 정세균 고문이 내세운 ‘빚 없는 사회’는 국민의 가장 큰 고민이 가계 부채란 점에 착안한 것이다. 새누리당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의 ‘걱정 없는 나라’도 국민의 3대 걱정이 교육ㆍ일자리ㆍ주거란 생각에서 처음 썼던 ‘생활 정치, 서비스 정치’를 바꿔 만든 슬로건이다. 민주통합당 김영환 의원의 “국민 홧병을 고쳐드리겠습니다”라는 슬로건도 비슷한 맥락이다.

슬로건에 민족주의나 거대담론이 사라지면서 후보 개인의 스토리를 녹여내는 말은 많아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보통 사람’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이 대표적이다. 올해 등장한 대선 슬로건엔 그런 추세가 부쩍 늘었다.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은 ‘키다리 아저씨의 꿈’을 스스로 만들었다. 정광철 보좌관은 “ ‘키다리’는 일자‘리’ 창출, 교육을 통한 계층 사다‘리’ 기능 복원, 가족의 울타‘리’ 강화 등 ‘리’자 운율을 맞춘 것이다. 꿈은 이름에 들어간 ‘몽’자를 활용했다”고 전했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의 ‘가난한 대통령, 행복한 국민’은 23평 서민주택에 사는 자신의 가난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재오 캠프 관계자는 “사람들이 ‘대통령은 높은 사람인데 왜 가난한 사람인가’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려 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참조하는 경우도 많다. 김두관 전 경남 지사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을 연구했다. “정치적 성장 배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게 김 전 지사 캠프의 설명이다. 김 전 지사는 ‘아래에서부터’란 말을 즐겨 쓴다. 손학규 고문의 ‘저녁이 있는 삶’은 옥스퍼드대 박사 출신인 그의 유럽 생활이 영향을 미쳤다. 문구를 만든 김계환 비서관은 “손 고문이 ‘유럽에 있을 땐 저녁을 즐기더라’고 한 적이 있는 게 문구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슬로건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슬로건 제작 업체와 정치 컨설팅 업체도 늘고 있다. 전문 슬로건 제작 업체는 현재 10여 개에 이른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언론 창구인 유민영 한림국제대학원 겸임교수는 PR업체 선거 컨설턴트(피크15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일한 메시지 기획 전문가다. 유 교수는 “안 원장은 (슬로건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 원장은 현 상황을 오래된 체제와 미래 가치의 충돌로 보고, 상식과 원칙으로 풀어가되 그를 위한 가교로 복지, 정의, 평화가 있다고 본다”며 “이를 위해 소통이 필요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기본 인식”이라고 전했다.

무엇이 좋은 슬로건인가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브랜드 전문가 김형남 이름세상 대표는 “최근 슬로건 중 ‘빚’과 ‘걱정’ ‘화병’이 들어간 것은 답답한 현실과 무거운 국민 마음에 착안했지만 부정적 의미가 강한 단어라서 서브 슬로건으로 적당하다. 메인 슬로건엔 긍정적인 단어가 들어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노무현 재단에서 ‘5월은 노무현입니다’란 슬로건을 만든 카피라이터 정철씨는 “대선 주자를 상품으로, 국민을 소비자로 보면 선거는 하나의 마케팅”이라며 “기존 정치 캠페인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에서 메시지 전략을 담당한 조동원 홍보기획본부장은 시대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특정 계층을 타깃으로 하는 광고와 달리 정치 슬로건은 다양한 계층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며 “유권자에게 뾰족하게 파고 들어가는 동시에 물처럼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광고 전문가들은 후보자와 시대정신이 맞아떨어지고, 경쟁자와의 차별화 포인트를 잡는 게 성공하는 슬로건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e-북승리를 부르는 슬로건 필살기엔 ‘슬로건 10계명’이 있다. 대중 언어를 쓰고, 단순해야 하고, 스토리를 담는 게 대중에게 잘 먹히는 슬로건이란 게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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