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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서 스러진 팔로군 선전원이 찍은 전쟁터의 일상

중앙선데이 2012.07.08 00:29 278호 16면 지면보기
형식에 내용이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책에선 시리즈물이 그렇다. 세계 주요 사진가들로 구성된 ‘열화당 사진문고’가 서른 권쯤 나올 때까지 중국어권 사진가가 없었다. 구색을 갖춰 보자, 발단은 그렇게 된 것이었다.우리나라에 사진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지만 일본 말고는 아시아의 근대 사진가들을 체계적으로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앞서 나온 대만 사진가들도 그랬지만, 중국 사진가들도 직접 현지에서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북디자이너 뤼징런(呂敬人) 교수로부터 사진 관계자 한 명을 소개받아 초기 다큐멘터리 사진가 중 중국을 대표할 만한 이를 추천해 주길 부탁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 부담스러웠는지 반응이 소극적이었다. 몇 차례 다른 시도도 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자 우선 중국에서 출간된 사진책들을 사들였다. 대륙이 넓은 만큼 작가도 지역별로 엄청나게 많았다. 한 권, 한 권 검토하고 잡지 특집기사들을 살피며 후보를 좁혀 나간 후, 베이징의 한 사진 전문 갤러리의 도움으로 두 사진가의 유족 연락처를 얻었다. 그들에게 첫 e-메일을 보낸 게 2008년 가을이었고, 2011년 가을 책이 출간됐다.

숨은 책 찾기 <12> ‘열화당 사진문고’ 중국 사진가편 『사페이』

좡쉐번(庄學本, 1909~1984)과 사페이(沙飛, 1912~1950)는 모두 중국이 봉건주의의 병폐와 제국주의 열강에 신음했던 1930~4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다. 새로운 문명과 사상이 유입되던 상하이라는 근대적 공간에 있던 두 젊은이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고, 좡쉐번은 변방의 소수민족을 기록하기 위해 서북지역으로, 사페이는 항일전쟁의 근거지였던 동북지역으로 떠났다.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생명력 넘치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좡쉐번의 사진은 단번에 눈길을 끌었고, 별다른 고민 없이 출간을 결정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의 사진 선전원으로 중일전쟁의 현장을 기록한 사페이는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군사진가였던 로버트 카파나 유진 스미스의 강렬한 사진풍에 길들여진 탓인지, 일견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최전선이 아닌 후방 진차지군구(晋察冀軍區, 중국 공산당의 혁명 근거지로, 산시성·차하얼성·허베이성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활동한 당 소속 사진 선전원이었던 사페이는 극적인 이미지를 좇았던 ‘라이프’나 매그넘의 사진가들과는 다른 처지였다. 외부자가 아닌 내부자의 시선이었으며, 중국인들의 사기와 단결을 도모하고 후방 민주 건설을 위한 기록이 목적이었다. 그렇다고 정치 선전을 위한 선동적인 장면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전장에서의 일상을 세심하게 포착한, 첫인상은 강렬하지 않지만 볼수록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진이라고 할까.

격변의 시대는 사페이를 혁명이라는 사회적 이상으로 향하게 했지만, 예술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다른 한쪽에서 늘 그를 붙잡고 있었다. 이 둘을 혁명시대 예술의 이상적 형태로 실현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루쉰의 목판화 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그는 39년 진차지군구에 신문사진과를 설립하고 42년 항일 근거지를 기록한 화보집인 ‘진차지화바오(晋察冀畵報)’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그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 천성적으로 낭만적 성향은 결국 그의 내면을 몹시 괴롭혔던 듯하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시점에서 그는 돌연 죽음을 맞는다. 동기를 알 수 없는 살인사건으로 화베이군구 정치군법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50년 3월 4일 형을 집행한 것이다.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였다.
‘구색’을 점잖게 말하면 균형이나 다양성쯤 될 터인데, 그것은 숨어 있는 세계와 마주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되기도 한다. 사페이의 발견은 나에겐 뜻밖의 행운이었다. 책 만드는 이가 누리는 이런 호사가 미안해서라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만남은 또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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