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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단죄에 충격, 과학 버리고 철학 선택

중앙선데이 2012.07.08 00:23 278호 25면 지면보기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1581/85~1666)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데카르트의 초상화(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돼 수학 시간에 배운 것들이 가물가물해도 방정식에 나오는 x, y, z, a, b, c라든가 x축 y축이 있는 좌표(座標, coordinates), 22, 23과 같은 제곱, 세제곱의 표기법을 잊어버리기는 힘들다.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창안한 것들이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16>르네 데카르트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다. 19세기 초반부터 그런 인정을 받았다. ‘근대의 아버지’ 중 한 명이라고도 해도 무방하다. 물리학·화학·심리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도 데카르트를 거론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좌표기하학이라고 불리는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 analytic geometry)의 창시자다. 해석기하학이 없었으면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가 발전시킨 미적분학(微積分學, calculus)도 없었다. 1637년에는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를 설명했다.

데카르트는 16세 때부터 수학에 몰두했다. 수학의 확실성에 매료됐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에겐 수학이 철학보다 우선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지 말라고 1648년 경고하기도 했다. 1619년 11월 10, 11일 밤에 데카르트는 생생한 꿈을 세 번 꾸고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해석기하학 창시무지개 원리도 설명
1633년 갈릴레오가 교회로부터 단죄 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이 데카르트의 귀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그는 과학 연구를 거의 중단하고 철학으로 돌아섰다. 데카르트는 라플레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신학·철학·논리학·수학을 배웠다. 자신이 받은 예수회 교육에 평생 만족했지만 불만도 있었다. 특히 수학과 달리 철학에는 논란·불확실성이 많은 게 아쉬웠다. 갈릴레오 사건의 여파로 철학으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그에게 철학에 수학적 확실성을 도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철학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과학에서 이룩한 성과를 방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의 과학이 가톨릭 신앙과 철학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데카르트가 활동한 시기는 과학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였다. 데카르트는 과학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그는 교회의 철학인 스콜라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했다. 교회의 철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인물이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철학은 신앙과 이성 사이에 쐐기를 박았다.

성경에 나오는 계시가 곧 진리인 시대였다. 보조적으로는 교회 전통이나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저술한 문헌에 진리가 나와 있었다. 이를 무시하고 데카르트는 불확실성에서 출발했다. 그는 물었다. “확실한 게 무엇인가?” 그의 방법은 모든 것에 대해 극단적으로 회의하는 것이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고, 악령(惡靈)이 나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너무나 자주 맥락을 떠나 인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의 결론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프랑스어 Je pense, donc je suis, 라틴어 Cogito ergo sum, 영어 I think, therefore I am.)”로 상징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인생에서 적어도 한번쯤은 모든 것에 대해 최대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미 같은 생각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생각하기를 포함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의식하며, 이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가 진리 인식의 기준으로 내세운 조건은 명석(明晳·clear)과 판명(判明·distinct)이다. 어떤 개념의 내용이 명료한 사태(事態)가 명석(clear)이다. 명석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념과 충분히 구별되는 것이 판명(判明·distinct)이다.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지식은 신(神)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은 우리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앙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보는 견해가 주류다. 일찍 고아가 된 그가 예수회 성직자들을 부모처럼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자신의 철학 체계를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으로 채택하게 만들겠다는 데카르트의 포부는 사실은 ‘위장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데카르트가 몰래 이신론(理神論)이나 무신론을 믿었다는 주장이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기됐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도 신랄한 의혹을 제기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최선을 다해 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학문적으로는 데카르트에게 큰 빚을 진 아이작 뉴턴도 데카르트 철학의 귀결점은 무신론이라고 비난했다. 데카르트의 저서 중 상당수는 1663년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1720년에는 파리대학 커리큘럼에 포함됐다.

하루 10시간 자며 맑은 머리로 철학 매진
데카르트는 개신교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가톨릭 측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활동기는 30년 종교전쟁(1618~48) 기간과 겹친다. 데카르트에게는 가톨릭이냐 개신교 신자냐가 아니라 이성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중요했다. 데카르트는 은총을 강조하는 가톨릭·개신교와 달리, 진리를 발견하고 덕을 쌓는 게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가톨릭·개신교 모두에게 이단이었다.

당시 지성계를 지배하는 인물들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예수회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데카르트도 이들이 형성하는 국제적인 공동체의 멤버였다. 데카르트가 예수회의 스파이였다는 설을 A. C. 그레일링이라는 학자가 제기했다. 데카르트는 군 생활을 개신교 진영에서 하기도 했다. 정보수집이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에서 거주한 것도 사상의 자유를 찾아서가 아니라 스파이 활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학자들은 스파이로 채용되는 일이 흔했다. 사회 명사들과 교류하는 학자들은 1급 첩보원감이었다.

데카르트는 변호사·판사·의사들이 우글거리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장 낮은 등급이긴 하지만 1668년 귀족이 됐다. 키가 1m55㎝였던 데카르트는 한때 눈동자가 안쪽으로 몰리는 눈(內斜視)을 가진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헬레나 얀스라는 이름의 하녀와 관계를 가져 1635년 딸 프란시엔을 낳았다. 관계한 날짜를 일기에 기록했다. 친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프란시엔이 자신의 조카라고 둘러댔다. 딸은 5세에 성홍열로 사망했다.

그는 비밀주의자였다. 20여 년간 네덜란드에서 생활할 때는 거처를 수십 번 옮겨 다녔다. 친구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생년월일도 비밀로 했다. 누군가 서양 점성술로 그의 ‘사주팔자’를 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긴 서간문을 보면 데카르트는 달콤하면서도 논리정연했다. 비판을 당하면 참지 못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다. 차가움, 오만함, 강자에 대한 비굴함과 같은 인간적인 약점들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당시 지성계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한마디 했으나 평생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학문에 몰두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게으른’ 철학자였다.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느긋하게 살았다. 사치만 하지 않으면 되는 어머니가 남긴 넉넉한 유산 덕분에 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예수회 학교에 다닐 때부터 몸이 약해 늦게 일어났다. 학교 측의 특별 배려로 10시 미사 시간에 맞춰 일어나면 됐다. 하루에 10시간씩 잤다. 하루는 친구가 정오가 다 돼 그를 방문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고 놀라 “아프냐”고 묻자 데카르트는 “일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충분한 수면으로 머리를 맑게 하는 게 데카르트가 철학을 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자들도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랐다. 여자들 중에는 거물급도 많았다. 1649년 그는 철학 튜터가 돼 달라는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데카르트는 “날씨가 추우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양지바른 프랑스의 투렌 지방에서 태어난 그가 스웨덴으로 가는 것은 철학을 그만두는 것뿐만 아니라 명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마침 스웨덴에 60년 만에 최고의 추위가 들이닥쳤다. 그는 여왕을 만나러 새벽 4시 반에 마차를 타야 했다. 일주일에 3번, 한번에 5시간씩 가르치는 강행군이었다. 결국 스웨덴에 온 지 다섯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추운 날씨에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그의 면역 체계가 약해졌을 것이다. 53세였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크리스티나 여왕은 루터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개종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제시했다. 몸은 기계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그의 이원론을 표방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 데카르트는 설명하지 못했다. 데카르트가 더 오래 살아 이원론을 발전시켰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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