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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보이는’ 유리집 함께 쓰는 마당 마음의 벽도 허물까

중앙선데이 2012.07.08 00:16 278호 29면 지면보기
1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 전경.
서울시 신청사의 가림막이 걷혔다. 오랜 세월 보아왔던 석조건물 뒤편에 낯선 유리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두 건물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건축가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대비를 인식하기도 전에 시각적으로 불편하다. 일제강점기 시대 묵직한 건물을 압도하는 유리 건물의 형상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억측들이 네티즌이나 외국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간다. 꽤나 오랫동안 시빗거리가 될 것 같다.

최명철의 집을 생각하다 <6>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

노출증과 관음증의 건축 재료, 유리
최초의 유리건물은 1851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지어졌다. 전장이 565m나 되는 수정궁(Crystal Palace)이다. 제1회 만국박람회에서 대영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면서 서양 문명의 팡파르를 울렸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혁명 100주년 기념탑으로 지어진 에펠탑과 함께 역사를 바꾼 건축물이 되었다. 지구상에 유리와 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들의 출현으로 도시의 풍경이 바뀌었고 모더니즘의 역사가 시작됐다. 유리는 투명하다.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남에게 보여주고 싶고,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싶다는 인간의 노출증과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데 유리만 한 재료도 없다. 건축가로서는 도전하고 또 극복하고 싶은 재료다.

2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지어진 수정궁. 사진 PetrusBarbygere
이 같은 욕망을 구현한 유리집으로 대표적인 작품이 1945년 시카고 근교에 미스 반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지은 판스워드 주택(Farnsworth House)과 49년 미스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지은 필립 존슨의 글라스하우스(Glass House)다. 벽면이 온통 유리다. 나의 공간이 곧 너의 공간인 셈이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파격이었다. 건축주와 논란을 빚고 결국 소송까지 한 판스워드 주택은 빼어난 작품성과 동시에 건축적 교만이라는 논란 속에 국가문화유산이 됐다. 두 유리집 모두 경치 좋은 교외에 위치한 주말 별장이다. 그렇다면 도시 속 공동주택으로서 유리집은 가능할까. 지난해에 입주가 시작된 경기도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각 세대 1층
서판교는 뛰어난 입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청계산 남면과 마주하고 있는 광교산·백운산 자락의 수려함 사이에 있는 서판교는 최근 모 재벌 3세의 집 이야기부터 시작해 단독주택 붐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새로 뚫린 경수고속국도나 남서울CC 등의 환경도 인기 원인이다. 2006년 대한주택공사(현 LH공사)는 판교 신도시 부지 중 가장 입지가 좋은 이곳에 고급 주거단지를 기획했다. 외국인 초청 설계 경기의 방식으로 3명을 선출해 청계산 남사면 길게 늘어선 부지에 다양한 저층 연립주택을 건립했다.

3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 내부.4 미스 반데어 로에가 지은 판스워드 하우스. 사진 tinyfroglet 5 필립 존슨의 글라스하우스. 사진 Eirik Johnson
2단지는 운중천이 흐르는 길에서 보면 서측 위쪽의 1단지와 동쪽 고속도로 전에 있는 3단지 사이에 가장 낮은 부지에 위치해 있다. 올망졸망 하얀 입방체들이 늘어선 전경은 낮아서인지 편안하게 느껴진다.
차량이 들어서는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보이는 백색의 건물과 유리로 된 풍경은 낯설다. 마당에 서면 쇼케이스 형태의 건물들이 양옆으로 마주해 있다. 각 세대 1층은 4면이 온통 유리다.
그런데 유리벽을 사이로 마주한 상대가 모르는 사이라면 둘 다 불편해진다. 마네킹이 움직이면서 나를 바라보거나 우리 속의 동물이 나를 보고 웃는다고 생각해 보라. 내 시선의 선택권과 타인의 시선 간에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 설계자인 일본의 노 건축가 야마모토 니켄(山本理顯)은 이런 관계에 주목한 사람이다.

“20세기 들어 ‘한 주택=한 가족’이라는 형식이 자리 잡았다. 이런 가족 전용 주택을 목표로 설계한 결과 주택은 그 지역 및 환경과는 분리된, 획일적인 패키지 상품이 되고 말았다. 고령화 등으로 인구 구조가 급격히 변하고 가구당 평균 인구 수가 2인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주택은 미래 라이프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지어져야 한다. 이제부터는 주택과 주택 사이의 관계 즉 공동체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는 바로 핵가족만의 자율성과 완결성에 그쳐 밀실에 가까워진 현대의 주거문화를 경계하면서 새로운 관계의 복원을 주장하는 그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21세기 버전 이웃사촌 만들기 실험
10여 가구씩 나누어진 9개의 동네는 각기 공동 데크 형식의 마당이 있고 이 공간으로부터 각 집의 현관이 연결된다. 현관이 있는 이 유리집을 건축가는 ‘사랑방’이라 불렀다. 일본에도 있다는 이 사랑방 형식은 개념상 우리나라 전통 주거형식과 유사하다. 전통 가옥에서 사랑채, 또는 사랑방은 외부인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프라이버시를 우선하는 사적 공간(private space)과 열려 있는 공적 공간(public space) 사이의 매개공간, 즉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이었던 것이다. 이 사회적 공간이 넉넉해질 때 인간들의 관계가 풍요로워진다는 내용이 건축학 개론에 나온다.
노 건축가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이 사랑방은 거주자들이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꾸밀 수 있게 비워놓았다. 텅 빈 캔버스라 생각해 주길 바란다. 취미를 위한 방이거나 작업실로 쓸 수 있다. 응접실로 꾸며 손님을 맞는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가족만이 아닌 이웃을 의식하며 사용하는 장소가 되면, 거주자의 개성과 활기와 온정이 담기게 된다. 프라이버시와 커뮤니티, 이 둘이 공존하는 새 시대의 주택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술가들은 당대의 평가에서 종종 외면당해 왔다. 에펠과 미스도 여러 수모를 겪었다. 서판교 월든힐스 2단지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발 경기 하락에도 순조로운 분양을 마친 1, 3단지와 달리 2단지는 지난해 입주 때까지도 50% 미만에 머물렀다. 구조조정 중인 LH공사로서는 애물단지였다. 현재까지도 몇 가구가 미분양이란다. 그런데 입주 후 사계절을 지낸 지난봄부터 조금씩 변화가 감지됐다. 각양각색으로 인테리어가 된 이 사랑방 공간을 중심으로 이웃끼리 저녁을 함께하거나 다양한 모임을 여는 액티비티가 하나 둘 생기고 있다고 한다. 낯선 사람이 이웃 사촌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 실험이 시작된 셈이다. 결과는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자료 제공 야마모토 니켄(山本理顯)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 '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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