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재발견

중앙선데이 2012.06.30 22:41 277호 31면 지면보기
변호사생활을 시작한 지 100일이 조금 지났다. 사무실 분위기와 업무처리 방식이 법원과 완전히 달라서 새롭게 적응하느라 정신 없이 지내고 있다. 새로 배우는 자세로 출발한다고 마음먹었지만 30년 넘은 법관생활에서 몸에 밴 습관이 쉽게 변하지는 않는 듯하다.

법관과 변호사는 같은 법조직역이라는 것만 빼고는 다른 점이 훨씬 더 많다. 사건을 보는 중심이 ‘무엇이 옳은가?’에서 ‘당사자에게 무엇이 유리한가?’로 옮겨가고, 사건에 관한 ‘법리적 판단’ 못지않게 변론 방법에 관한 ‘전략적인 판단’도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새삼스럽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현상을 발견했다. 변호사 업무를 할수록 ‘변호사에 대한 이해’가 늘기보다 ‘법관에 대한 이해’가 더 새로워진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사명감을 갖고 보람 있게 법관으로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짧은 변호사 경험으로도 이전에 갖고 있던 법관에 대한 자의식이 피상적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추상적 사유’와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의 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100일의 짧은 체험이 30년 생활의 폭을 넘어서는 사실이 좀 당황스럽다.

재판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 서보니 법관의 판단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작은 결정 하나도 당사자는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그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을 자주 본다. 법관의 말 한마디, 작은 행동도 당사자에게는 큰 영향을 미친다. 법관을 하면서 법관의 태도가 당사자에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정은 지금처럼 실감하지 못했다.

법관은 정말 균형 잡히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사람이어야지, 경솔하거나 인격적으로 부족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날로 커진다. 재판부가 결정되면 재판장이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부터 알아보는 당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은 법관이 대부분이지만 경솔한 재판장, 심지어 위험한 재판장 소리도 가끔 들린다. 나도 오랫동안 저런 관심과 염려의 대상인 법관으로 지냈는데, 과연 당사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 사법연수원에서 후배 법관들을 상대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법관직을 떠나서야 법관직의 소중함을 참으로 깨닫게 된 지금 심정을 ‘법관의 재발견’이라고 표현했다. 법대 아래에서 재판을 받는 변호사의 경험을 한 후에 법관이 된다면 훨씬 사명감 강하고 올바른 법관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무엇을 떠나 보아야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래전 미국에서 연수를 할 때도 마찬가지 경험을 했다. 1년의 짧은 생활로 미국을 이해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지만, 그 경험이 우리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이라는 거울로 볼 때 무엇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3주간 유럽여행을 갔었는데, 그 짧은 여행으로 유럽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미국을 신대륙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일상 속에 파묻혀 있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일상을 깨고 나올 때에만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재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새롭게 보는 데 참뜻이 있다. 질병이나 실패도 일상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겪어보지 못했던 고통 속에서야 비로소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눈을 얻게 된다.

하지만 늘 여행을 떠날 수는 없고, 더구나 고통을 일부러 찾아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바다가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없다. 파도 위로 몸을 솟구쳐 오를 때에야 바다를 볼 수 있다. 산에 높이 올라야 내 동네가 드넓은 하늘 아래 좁은 땅의 한 구석임을 알게 된다.

결국 비결은 마음의 어약연비(魚躍鳶飛) 아닐까? 물고기가 물 위로 뛰어오르고 솔개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경지. 늘 마음을 힘차고 높이 하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을 새롭게 하고 싶다. 법관의 재발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일상의 재발견을 하고 싶은 것이 요즈음 내 심정이다.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