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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아이들과 뛰놀던 ‘노랑머리 귀신’은 갔어도 …

중앙선데이 2012.06.30 22:20 277호 8면 지면보기
장쑤(江蘇)성 전장(鎭江)에 있는 펄 벅의 옛집. 그가 쓰던 방 화장대 위엔 오래된 성경이 놓여 있다.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온 펄 벅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공한 후 기독교를 버린다.
장쑤(江蘇)성 전장(鎭江)에 있는 펄 벅의 옛집에는 ‘싸이전주구쥐(賽珍珠故居)’라 쓰인 현판이 붙어 있다. 싸이전주는 그녀의 중국 이름. 싸이가 성이고 진주(pearl)라는 뜻의 전주가 이름이다. 선교사인 아버지 압솔름은 독일계의 성 시든스트라이커(Sydenstricker)를 싸이로 바꿨다. 엄청난 단순화다. 자신의 이름은 앞으로 기운이 상서롭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자오샹(兆祥)으로 지었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⑩장쑤(江蘇)성 전장(鎭江)의 펄 벅 옛집

펄 벅의 옛집 옆에는 기념관이 새로 개관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그의 흉상이 맞이한다(사진 위). 펄 벅의 『대지』는 출간되자마자 바로 베스트셀러가 됐을 뿐만 아니라 수십 개 국가에서 번역돼 팔려나갔다.
이 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으니 그의 이름대로 상서로운 집인데 미국 집이 그렇듯 서늘하고 어둡다. 집안의 이력을 알고나면 더 그렇다. 펄은 난징과 상하이 그리고 소설 대지의 무대가 되는 안후이(安徽)성의 난쉬저우(南徐州)에서 살았는데 대학 갈 때까지 15년을 산 이 집이 진정한 옛집이다.

이 집은 그녀가 태어난 웨스트 버지니아주 힐스보로에 있는 생가의 판박이다. 모두 두 개의 기둥으로 받친 현관이 2층 집 정면에 돌출돼 있다. 다만 통나무집인 생가와 달리 벽돌집이어서 이미 백 년을 지나 앞으로 천 년도 서 있을 것 같다. 1층의 절반은 넓은 거실인데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을 경계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 오른쪽에는 어두운 색조의 가을 풍경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중국 병풍 옆에 오르간이 놓여 있다.

같은 집에서 다른 세계를 살았던 압솔름 부부의 차이가 이 공간 배치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남편은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세속적인 일에 무신경했고,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온 부인 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심을 잃고 세속적인 것, 미국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녀는 오르간을 치면서 향수병을 달랬는데 막내딸 그레이스는 피터 콘이 지은 펄 벅 평전에서 갑자기 흐르기 시작한 눈물 때문에 연주를 그만두던 어머니의 모습을 회고했다.

펄 벅의 어머니 캐리는 죽을 때까지 웨스트 버지니아주 힐즈버러에 있는 고향집(사진 위)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전장에 고향집과 똑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사진 아래). 펄 벅은 고향집에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중국으로 왔다.
압솔름과 일곱 자녀를 낳았으나 네 명의 아이를 저세상에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다. 그래서 제발 이 아이만은 미국에서 낳자고 해서 잠시 원정 출산(?)한 아이가 펄 벅. 캐리는 미국에서 살자고 간청했지만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집은 여생을 갇혀서 보내야 했던 유배지였다고 펄 벅은 엄마의 일대기를 다룬 유배에서 썼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외국인 거류지역에 모여 살았다. 압솔름은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신조로 집을 짓고 따로 나와 살았다.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을 비롯해 외국인과 선교사를 상대로 한 중국인들의 공격이 잇따르던 시기에 따로 나와 산다는 건 용기 이상의 신념이 필요한 일이었다. 캐리는 남편이 순회 선교하러 집을 떠나면 바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고립됐다.

하지만 펄 벅은 달랐다. 네 살 때부터 이 집에 살았던 펄 벅의 방은 1층 뒤편에 있다. 잠시 외출한 것처럼 집에서 입던 중국옷이 옷걸이에 아직도 걸려 있다. 그 옆방은 보모였던 왕씨 부인이 살았다. 왕씨는 펄이 중국과 연결되는 통로였다. 펄은 비록 ‘노랑머리 귀신’이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중국 아이들과 뒤섞여 놀았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중국어로 먼저 생각하고 영어로 번역한다고 말한 바 있다.

펄이 자라난 전장은 최소 2500년의 역사가 고증되는 곳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 손상향과 정략적 결혼을 한 감로사가 전장의 북고산에 있다. 지은 지 1400년이 모두 넘는 금산사와 정혜사, 융창사 등 3대 사찰과 2000년이 넘는 도교의 모산도원이 있다. 하지만 압솔름에게 전장은 사탄의 소굴이었을 뿐이다. 1880년 항저우(杭州)에서 시작해 상하이에서 임종할 때까지 51년간 선교를 위해 뛴 압솔름은 버지니아주 출신이다. 버지니아주는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동맹 쪽. 네 명의 형이 남부동맹을 위해 싸웠고 나이가 어려 징집되지 않았던 압솔름은 패배의 아픔을 곱씹으면서 자신을 전쟁보다 더 위험하고 어려운 과업에 던질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중국에 왔다.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과 시장을 찾아 중국에 오듯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기독교도들에게 인구가 많은 중국은 이교도가 많은 선교의 최적지였다.

전혀 다른 두 나라가 내 여행에서 인연을 맺을 때가 있다. 미 대륙을 횡단할 때 버지니아주 렉싱턴의 워싱턴 앤드 리 대학을 들른 적이 있었다. 원래는 워싱턴 칼리지였는데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동맹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이 대학의 총장을 맡고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덧붙여 워싱턴 앤드 리 대학이 됐다. 지금도 리 장군의 시신이 남북동맹의 깃발에 뒤덮인 채 대학 구내에 안치돼 있다. 압솔름이 바로 이 대학을 졸업했다. 렉싱턴은 버지니아군사학교까지 있는 대학도시지만 지금도 인구가 7000명밖에 안 되는 소도시다. 펄 벅 역시 부근 린치버그의 랜돌프-메이컨 여대를 나왔다.

이 지역에 가면 백인 일색의 한적한 농촌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전통을 지닌 교회, 황소 고집, 상처받은 자존심과 같은 남부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압솔름 가족이 미국에서도 외진 버지니아 주 남서부를 떠나 행상, 부랑자, 농부, 아이들이 북적대는 전장의 비좁은 골목에서 살았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다른 두 세계였다. 그리고 이 다른 두 세계를 잇는 방식은 모두 달랐다.

압솔름은 남부의 기질대로 한 번도 신앙이 흔들려본 적이 없다. 그는 중국 이름을 쓰고 중국 옷을 입고 나귀를 타고 순회 선교를 다니면서 성경을 중국의 구어체로 번역하는 데 헌신했다. 선교 외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대지조차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복음만 강조하는 근본주의적인 선교방식은 효과적이지 못해 51년 동안 개종시킨 이교도가 1만 명도 채 안 된다고 한다. 미국에서 파견한 선교사가 20세기 초에는 8000명을 넘었는데 그의 성적은 하위 1000명에 속했다. 개종자 숫자로 평가하는 게 미국답기는 하다.

압솔름은 더구나 기독교도마저 두 명 잃어버린다. 그중 한 사람은 부인 캐리. 캐리는 남편의 맹목적 신앙과 여성학대적 태도에 절망해 기독교를 버리면서 임종을 맞이했다고 펄 벅은 유배에서 썼다. 다른 한 사람은 펄 벅 자신. 펄 벅은 왼쪽 거실도, 오른쪽 거실도 아니라 현관문을 박차고 그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펄 벅은 대학 졸업 뒤 중국에서 20년 선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소설가로 성공한 이후 ‘1933년 부활절’이라는 글을 통해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는 선교사들이 문화적 오만과 잔인함으로 선교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해 세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반대로 중국인과 중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중국의 ‘선교사’로 변신한다.

펄 벅의 옛집 옆에는 최근 기념관이 개관됐다. 이 기념관에는 1938년 노벨상 수상식에서 했던 그의 연설문이 걸려 있다. 당시 중국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던 중이었다. “중국 인민의 삶은 오랜 세월 나의 삶이었다. 조국과 나를 키워준 중국에 대한 마음은 여러 방면에서 똑같다. 자유에 대한 사랑에서 무엇보다 지금 그렇다. 모든 투쟁 중에서 가장 위대한 투쟁인 자유를 위한 투쟁을 중국 전체가 벌이고 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중국을 찬미한 적이 없다…자유를 얻으려는 결의가 중국의 본질적인 품성으로 깊숙이 뿌리 박혀 있어 정복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동서 냉전이 한창일 때인 62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중국인들의 설날 연회에서는 “나는 그들이 빛의 속도로 산업화하고 근대화할 수 있다는 걸 믿는다”며 중국의 미래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그는 미국 정부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위대한 민족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중국에서 ‘문화적 제국주의자’라고 버림을 당했다. 34년 중국을 떠난 이후 중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닉슨 대통령이 72년 중국을 방문할 때 함께 가기 위해 그는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주 캐나다 중국대사관의 2등 서기관은 이렇게 회신했다. “당신이 오랫동안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중국의 인민들과 지도자들을 왜곡하고 비방하고 중상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정식으로 통보하는 바 입니다.”

그녀는 만년에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미국보다는 중국에 살고 있다고 말하곤 했지만 몸은 미국에서 73년 3월 6일 영면했다. 그는 어머니와 다른 의미에서 ‘유배자’였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민족이라는 모자를 쓰고 박물관에서 기려지듯 그에 대한 중국의 태도도 바뀌었다. 기념관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쓴 글이 헌액돼 있다. “중국 인민에 대한 깊고 두터운 감정을 갖고 있어 항일전쟁 중 중국과 함께한 중국 인민의 친구다.”

역사의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함포의 지원을 받은 ‘복음’의 전파는 49년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극적인 막을 내렸지만 개혁·개방 이후 기독교가 중국에 퍼지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과 융합은 항상 놀랍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6월 23일까지 중국 자전거 여행을 하는 필자의 소식은 매일 미투데이(http://me2day.net/zixingche)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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