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서 삶 마감하려고…" 외국인 강사의 기적

중앙일보 2012.06.28 01:47 종합 22면 지면보기
노규정 교수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던 피터 재코버스(57)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족과의 불화, 문 닫은 직장….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우연히 인터넷 광고에서 한국에 영어 학원강사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새 인생을 살기 위해 지구 반대편의 작은 나라로 향했다.


삶 정리하러 와 새 삶 얻었네요, 고마워요 한국
영어강사였던 남아공 재코버스
암 걸린 뒤 여생 보내려 서울행
아버지가 의사인 제자와 인연
14시간 대수술 끝에 종양 제거

 한국 생활은 즐거웠다. 아이들은 밝았고 어른들은 친절했다. 재코버스는 “이곳에 온 뒤 한국인의 열정과 노력에 매순간 감동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 어느 날 가슴과 등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3년을 참아내다 2009년 학원에 휴가를 내고 고향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남아공의 한 병원에서 그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뼈에 암이 생기는 희귀난치병인 연골육종이란 판정을 받은 것이다.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남아공 현지 의사는 그에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했다. 1년 정도밖에 못 사니 삶을 정리하라는 취지였다. 그는 남은 인생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26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종양제거수술을 받은 남아공 출신 영어강사 피터 재코버스(오른쪽)가 주치의 김송철 교수와 함께 웃고 있다. [사진 아산병원]
 지난해 4월 그는 두 번째로 한국땅을 밟았다. “한국 사회에서 한번 맺어진 관계는 끈끈하다.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스승의 날에는 학부모가 찾아와 함께 식사했고 생일에는 아이들과 파티를 했다. 한국은 내게 가족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는 예전에 알았던 학원 원장의 도움으로 일자리도 얻었다.



 지난 4월. 서울 대치동 영어학원의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가 여섯 살이었던 6년 전 잠깐 가르쳤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소녀는 길에 서서 재코버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의 가슴과 등 부분이 혹처럼 부풀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찌된 사정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재코버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삶을 정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소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제 남편이 의사입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서울아산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노규정 교수였다. 노 교수의 도움으로 재코버스는 지난 5월 서울아산병원을 방문했다. 검사 결과 갈비뼈의 암이 이미 간·늑막·횡경막에 전이돼 있었다. 연골육종은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재발하고, 일단 재발하면 금세 커져 악화된다.



 병원은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지난 5일 오전 7시 재코버스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오른쪽 가슴을 열고 갈비뼈뿐 아니라 피부와 근육, 간·흉벽·횡경막을 들어냈다. 허벅지 피부와 근육을 가슴에 이식했다. 14시간에 걸친 대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비·입원비 등 1130만원은 병원에서 700만원을 부담했고, 재코버스와 그의 한국 지인들이 나머지를 마련했다. 그는 “한국이 나에게 기적을 줬다. 한국에서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