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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어르신들은 즐길 거리에 목말라 있다”

중앙일보 2012.06.27 00:00 종합 33면 지면보기
김기환
사회부문 기자
지난 24일 오후 2시. 서울 미근동 서대문역 인근 ‘서대문아트홀’에선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650석 극장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으로 꽉 찼다. 원로가수 금사향(83)씨가 무대에 올라 ‘홍콩 아가씨’를 부르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흥에 겨워 박수를 쳤다. 4시에 마칠 예정인 공연은 쏟아지는 앙코르 요청으로 한 시간 뒤인 5시에 끝났다.



 공연장에서 용돈 1만원으로 하루를 산다는 유만열(64)씨를 만났다. 그의 빼놓을 수 없는 주말 일과는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 그에게 서대문아트홀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제게 이곳은 청춘입니다. 나이를 잊을 수 있으니까요.”



 ‘청춘 극장’ 서대문아트홀이 문을 닫는다. 1964년 ‘화양극장’이란 이름으로 개관한 지 48년 만이다. 한때는 잘나갔다. 1980년대 ‘영웅본색’ 시리즈와 ‘천녀유혼’ ‘예스마담’ 같은 영화를 단독 상영해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1990년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등장하며 위기를 맞았다. 관객이 줄자 98년엔 ‘드림시네마’(시사회 전용극장)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2009년 5월엔 서대문아트홀(노인 전용극장)로 변신했다. 이제 그마저도 추억으로 남을 예정이다. 서울시가 지난해 이 자리에 25층짜리 관광호텔을 짓도록 허가했기 때문이다.



 이날 공연에선 어르신들의 아쉬움이 묻어났다. 관람객 양윤(75)씨는 “주말마다 남편과 젊은 시절 데이트하던 기분으로 극장을 찾았다”며 “이제 무슨 낙으로 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가수 프레스 리(66)씨는 “이곳 무대에 올라 꿈을 키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쉽다”고 말했다.



 서대문 극장 사례처럼 ‘어르신 문화’는 자리를 잡기 어렵다. 찾는 어르신은 많지만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르신은 꾸준히 늘고 있다. 최근 한 외국계 투자은행은 2045년 한국의 노동인구 평균 연령(50세)이 세계에서 가장 높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1위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준비는 거의 전무하다. 문화 복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뒤처진 분야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싸고 질 좋은 어르신 전용 문화공간이 필요한 이유다. 서대문아트홀을 지켜달라고 서명한 사람은 1년 새 3000명을 넘어섰다. 김은주(38) 서대문아트홀 대표는 “어르신들은 즐길 거리에 목말라 있다”며 “요즘도 매일 500명의 어르신이 극장을 찾는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의 관람료는 300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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