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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진주(晉州)와 양저우(揚州)

중앙일보 2012.06.25 09:30
중국 양저우(揚州)를 방문하는 한국사람들이 늘고 있다. 양저우는 인근 타이저우(泰州)와 사이에 새로운 공항이 생겨 교통이 좋아졌고 당대(唐代) 번화한 도시의 모습을 재현 정비하였다.



양저우는 사실 예부터 한국에 많이 알려진 도시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중국의 동해안과 교역이 늘었고 특히 양저우가 그 중심에 있었다. 양저우는 중국에서도 인기 있었던 대하 드라마 “海神”의 무대로 신라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라인 최치원(857-?)이 조기유학으로 당으로 건너가(入唐)하여 양저우에서 벼슬한 인연이 있어 최치원기념관이 있다. 양저우는 최치원의 호(海雲)를 딴 부산의 해운대구와는 자매도시이다. 최치원이 신라에 귀국한 후 집필한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양저우의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계원은 당시 양저우의 별명이기도 하다.



양저우 사람들은 수당(隋唐)이래 중국 제일의 도시(富甲天下) 양저우가 명나라 말기(明末) 청군(淸軍)에 의해 초토화되고 양민이 대학살을 당했던 것을 기억한다. 여진족 누루하치의 아들 도도(多鐸)가 지휘하는 청군은 1645년4월 양저우에 도착했다. 양저우는 남명(南明)의 수도 난징(南京)의 관문이었다. 베이징을 점령한 청군의 사기는 하늘에 닿아 예부상서 사가법(史可法)이 방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양저우를 점령한 청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 학살된 자가 수십만에 이르렀다. 성내의 모든 우물은 시체에 덥혔고 운하는 시체로 막혀 물이 흐르지 못했다고 왕수초(王秀楚)는 “양저우의 10일간 대학살(揚州十日記)”에서 기록하고 있다.



양저우 대학살과 비슷한 역사가 있는 곳이 한국의 진주(晉州)다. 진주도 양저우와 같이 산과 강이 어우르는 풍광이 수려한 예술 문화 도시이다. 1592년4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明)을 정복하고자 하니 조선은 길을 달라(征明假道)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그 해 10월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곡창인 전라도를 보급기지로 삼고저 전라도의 관문인 진주성으로 몰려왔다. 진주성의 영웅 김시민 목사(牧使)가 백전백승의 일본군에 첫 패배를 안겼다.



진주성 대패에 크게 분노한 히데요시는 다음 해 6월 진주성으로 모든 일본군을 집결 끝내 함락시키고 성내에 피난 중이던 5만의 양민마저 살육했다. 지금도 음력 6월이면 420여 년 전 원혼이 하늘을 떠돌면서 진주에는 비가 내린다. 양저우와 진주는 침략자들에 의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안고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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