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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5) 신해혁명 최고 공로자

중앙일보 2012.06.25 00:17


▲1912년 2월 15일 난징에서 쑨원이 임시정부 관원들과 함께 한족(漢族)의 마지막 왕조였던 명(明)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의 능을 참배하고 있다. 신해혁명은 만주족 왕조였던 청나라를 무너뜨린 민족혁명이었다. 1911년 12월 귀국 후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선출됐지만 북방의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제를 선포하자 총통직을 내놓고 임시정부를 해산했다. [사진 김명호]

“신해혁명 최고 공로자는 후베이성 도독과 군사령관”



1911년 10월 6일, 혁명군 군정부장(軍政部長)에 추대된 쑨우(孫武·손무)는 총리 류궁(劉公·유공)과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쑨우는 손재주가 남달랐다. 유인물을 만들고 포고문에 찍을 도장도 직접 새겼다. 사제폭탄도 만들 줄 알았다. 사진관 주인이다 보니 화학약품 구입이 남들보다 수월했다. 하루에 엉성한 폭탄 50개 정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10월 9일 오후, 거사 이틀을 남겨 놓고 엉뚱한 사건이 터졌다. 류궁에게 온종일 담배를 물고 다니는 류퉁(劉同·유동)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엄마가 부른다며 형을 만나러 왔다가 별생각 없이 성냥불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방 안에 염산(鹽酸), 흑연(黑鉛), 유황(硫黃), 철편(鐵片) 등이 널려 있었다. 구석엔 완성된 폭탄들도 쌓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쑨우의 얼굴과 두 손이 괴물처럼 변했다. 쑨우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혁명당원 명부나 문건 따위는 챙길 겨를도 없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류퉁은 16세 소년이었다. 혹형을 견디지 못했다. 혁명단체의 거점을 아는 대로 불어버렸다. 검거선풍이 불었다. 주모자급 3명의 목을 성문에 효수(梟首)했다. 지휘부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후베이성 도독(都督)은 얼치기 불교신자였다. 현실과 사바세계를 분간하지 못했다. 덜컥 겁이 났던지 염주를 들고 불당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대자대비(大慈大悲)는커녕 지혜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중국 역사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을 연출하지 못했다. 하급군관들을 모아 놓고 “여기 반란을 획책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나는 펼쳐보지도 않았다.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소각하겠다”며 불구덩이에 던져버리면 간단히 끝날 사건이었다.



지휘부가 괴멸되고 거사자 명단이 압수됐다는 소식이 나돌자 온 부대가 들썩거렸다. 어차피 죽을 목숨, 10월 11일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10일 새벽, 거의가 빈 총에 실탄 몇백 발을 들고 병영을 뛰쳐나와 무기고를 점령해 버렸다. 총소리에 놀라 불당을 뛰쳐나온 도독은 짐 보따리를 쌌다. 군사령관도 줄행랑을 놨다. 두 사람은 후일 쑨원의 칭송을 받았다. “신해혁명의 가장 큰 공로자는 후베이성 도독과 군사령관이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우한의 혁명파들이 지휘를 요청한 세 사람 중 쑹자오런(宋敎人·송교인)과 황싱(黃興·황흥)이 우한행을 포기하자 입원 중이던 탄런펑(譚人鳳·담인봉)은 분노했다. 병원에서 약품을 훔쳐 들고 우한으로 향했다. 중도에 혁명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 주먹으로 맨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런 일은 현장에 있고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 나이 51세,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지만 역량이 쑹자오런과 황싱에 미치지 못한다. 지금 간다 한들 쑨원에게 도움이 될 일이 없다. 쑨원의 앞날이 순탄치 못할 것을 생각하니 애통하다.”

탄런펑의 예언은 정확했다. 쑨원은 1884년 무장폭동에 실패한 후 27년간 해외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국내 기반이 신통치 않았다. 혁명이 성공했지만 한동안 귀국을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갔다간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를 다니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다들 냉담했다. 그사이 중국의 쑨원 추종자들은 큰소리치고 다니느라 쉴 틈이 없었다. “대형 함대에 무기와 황금을 가득 싣고, 미국 장군들과 함께 혁명을 지휘하러 오는 중이다.”



12월 21일 홍콩에 첫발을 디뎠을 때 기자들은 귀국 보따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빈털터리일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쑨원은 젊은 시절부터 별명이 ‘대포’였다. 되건 안 되건 큰소리부터 치는 성격이었다. 이날도 “귀국 선물은 단 한 가지, 혁명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국민은 어리석다. 유치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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