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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정말 슬픈 일이 한 다리 건너면 우습게 보이지 인생은 그런 것

중앙선데이 2012.06.23 23:16 276호 19면 지면보기
-이번 작품은 전작 ‘야끼니꾸 드래곤’과 닮은 듯 다르다. 굳이 비슷한 설정으로 간 이유는.
“장녀의 다리가 불편하고 자매 간 삼각관계 등 가족의 관계성 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가족 이야기라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야끼니꾸 드래곤’은 일본 관서지방의 이야기고 이쪽은 한국의 작은 가상 섬이 무대니 전혀 다르다고 봐주면 좋겠다.”

Who Are You : 재일 한국인 3세 연출가 정의신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인데, 어려움은 없었나.
“대본은 관서지방 사투리로 써서 역시 바다 근처 지방인 남도 사투리로 번역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재미있기도 하고. 삽입곡의 경우 전라도 노래 후보가 여럿 있었지만 아리랑은 좀 어두웠고 그래서 ‘까투리 사냥’을 택했다. ‘담배가게 아가씨’는 1987년 경 크게 히트한 노래를 찾다가 밝고 재미있고 부르기 쉬운 곡이었기 때문에 그걸로 갔다. 한국 풍속을 잘 모르니 조연출과 함께 만들어갔다. 무엇보다 일본 군인과 한국 여성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걱정이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랑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끌림을 얘기하려는 건데 오해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반응이 괜찮다.”

1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2 야끼니꾸 드래곤3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아버지가 헌병이었다는 데서 시작된 이야기인데, 헌병 이야기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헌병 이야기보다 작은 섬에 사는 한 가족에게 닥친 전쟁에 대해 그리고 싶었다. 헌병을 포함해 전쟁에 처한 사람들 모두 역사의 흐름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말려들었을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헌병도 중요한 모티브지만 전쟁에 휩쓸린 사람들 이야기가 이번 작품의 테마다.”

4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한·일 화해의 연극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화해를 테마로 하고 있지는 않다. 마지막까지 어머니 영순은 일본군을 용서하지 못한다. 일본인과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한국인과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전쟁에 대한 다양한 어프로치가 있지만 다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일 화해 같은 그런 과장된 이야기를 하려 한 게 아니다.”

5 야끼니꾸 드래곤
-한류 덕인지 요즘 한·일 관계는 우호적이지만 역사를 소재로 한·일 간의 우정을 이야기하면 역사왜곡이라 비난받곤 한다.
“이 작품을 씀으로써 친일파 소리를 들을 거라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나에게는 별로 관계 없는 이야기다. 나는 재일 한국인이라 그런 말을 들어도 ‘아, 그런가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나 자신도 역사가 낳은 존재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아버지가 역사의 흐름 속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처지라 일본에서 나고 자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본 만세도 한국 만세도 아니다. 이쪽만 옳고 이쪽은 나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자 하는 것을 관객이 알아줄 거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일본에서 차별받은 재일 한국인 이야기임에도 일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유가 뭘까.
“첫째는 연극적으로 자립한 재미있는 작품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가족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다.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의 이야기가 일본인에게는 고도성장기 가족이 붕괴되어 가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켰다. 재일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추억으로 받아들인 거다. 한편 한국에서는 현재 가족관계가 붕괴되고 있고, 이지메 문제를 포함해 매우 동시대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그 부분이 일본과 매우 달랐다. 내 연극의 특징은 다양한 노래와 리액션, 배우들의 육체 표현들이 융합해 만들어내는 높은 연극성에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평가받은 것이 아니라 역시 생생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뜨거운 것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최근작 ‘파마야스미레’에서도 재일 한국인을 소재로 했는데, 이제 사라져가는 역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이유는.
“‘파마야스미레’는 재일 한국인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가을에는 1920년대 남사당 이야기를 쓸 거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의 물결에 도리 없이 휩쓸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다. 아무것도 없는 노동자들, 재일 한국인이건 누구건 그런 서민들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거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를 연극인으로서 기록해 가는 작업에 관심이 있고, 좀 더 그 테마를 밀어붙여 가려고 한다.”

-일본 연극계에서 재일 한국인 연극인이 갖는 위상은 특수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 중 하나일 뿐인가.
“일본 극작가 중에 재일 한국인을 테마로 쓰는 작가가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은 특수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연극인들은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거나 부모가 연극계의 유명인사인 경우가 많은데 나는 부자도 아니고 조선인 부락 출신이니 다른 연극인들과 환경 자체가 다르다.”

-아내에게 계속 얻어맞는 무기력한 아버지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한국의 전형적인 가부장적 존재인 아버지와는 동떨어진 캐릭터인데.
“우리 아버지가 그런 타입이었다. 우유부단하지만 열심히 가족을 지키려는 착한 아버지인데, 한국에는 잘 없는 타입이었겠지만 그런 아버지를 그려보면 재밌겠다 생각했다. 맞는 장면은 좀 줄일까 했지만 일단 재미있으니 밀고 가기로 했다. 아버지역 정태화 선생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선물이라도 드려야겠다.(웃음)”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도 헌병을 사랑하는 정희 캐릭터는 매우 상징적으로 보인다.
“전쟁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법의 하나다. 장녀는 일본 군인과 사랑을 하고, 차녀는 군대의 클럽에서 돈을 벌고, 삼녀는 일본에 비판적이긴 하나 학교 선생이라는 입장이 있다. 막내는 항일운동을 하다 전쟁의 비극에 휩쓸리게 된다. 그저 전쟁에 대한 네 자매의 각각의 다른 부분을 그리고 싶었다.”

-장녀가 일본 군인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발을 씻겨주는 의미가 민감할 수 있다.
“살짝 에로티시즘을 노린 것뿐이다. 예전에 서울의 이발소에 갔을 때 실제로 발을 씻겨줘 깜짝 놀랐던 일이 있다. 여성이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매우 에로틱한 행위라고 생각해 연극적으로 두근거리게 하는 설정이 될까 싶어 넣어본 건데, 실패한 것 같아 유감스럽다(웃음). ”

-가장 비극적인 장면에서 웃기는 것이 정의신 연극의 특징이다. 웃음과 눈물을 뒤섞는 이유는.
“인생이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맞대고 동시 진행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당사자가 매우 비극이라 생각하는 순간도 조금 벗어나 바라보면 굉장히 바보스럽고 우스운 경우가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를 비롯한 네 딸들이 흰 저고리에 지팡이를 짚고 영구차 뒤에서 ‘아이고~’ 하며 울면서 따라갔다. 나는 택시를 타고 뒤따라갔는데 택시운전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죽었느냐고 묻길래 우리 할머니라니까 어이없어 하더라. 그렇게 본인들은 정말 슬프지만 한 발짝 떨어져 보면 우습게 보이는 그런 순간에 아, 인생이란 이런 거구나 느끼곤 한다.”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표현하는 비결이 있나.
“그저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까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관서지방 출신이라 요시모토희극(※오사카를 근거지로 한 일본의 대표적인 희극극단)의 영향은 엄청 받았다. 같은 개그를 세 차례 되풀이하지 않으면 성에 안찬다. 배우들에게도 세 번 반복해 달라고 하니 처음엔 이해를 못했지만 점점 적응해서 이제 알아서들 한다.”

- ‘야끼니꾸 드래곤’에 이어 어머니 역 고수희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완성도가 달랐을 것 같다.
“파워 있고 진정성도 있는 연기자다. 가만 놔둬도 점점 잘나갈 거라 생각한다. 요즘 영화, 방송으로 바쁜 것 같아서 안 나와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나오겠다고 하더라. 오히려 박수영, 염혜란 등의 배우가 나오는 것을 전제로 쓴 극이다. 고수희에게는 야끼니꾸 때와 똑같이 엄마 역밖에 없다고 굳이 권하지 않았는데, 전혀 성격이 다른 엄마니까 괜찮다고 하더라.”

-연극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계성이다. 배우 간, 연출가와 배우 간, 연출가와 스태프 간 각각의 관계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두가 가족처럼 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물로서는 관객이 즐거워할 수 있는 연극을 만들고 싶다. 관객이 배우와 함께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웃고 울고, 마지막에는 많은 것을 생각하며 집에 돌아가서 맥주 한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면 행복한 거라 생각한다.”

정의신(鄭義信)
1957년 일본 효고현 출생. 도시샤대학 문학부를 중퇴하고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 미술과 졸업. 쇼치쿠 영화사에서 미술담당으로 일하다 87년 재일 한국인들이 주축이 된 극단 신주쿠료잔파쿠 창립멤버로 참가.‘천년의 고독’(1990)으로 테아토르상,‘더 데라야마’(1993)로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을 수상하며 현대 일본 연극계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연극, 영화를 오가며 재일 한국인뿐 아니라 장애인, 빈곤층 등 경계인의 삶을 다룬 수많은 화제작을 생산했다.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느 쪽에서 뜨는가’‘피와 뼈’에서 시나리오를 담당해 기네마 준보 각본상, 일본아카데미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2008년 한·일 합작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일본의 양대 연극상인 아사히무대예술상과 요미우리연극상을 수상하고, 한국에서도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선정되는 등 한·일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올해 초 일본에서 ‘파마야스미레’를 초연해 각종 연극상의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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