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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구의 쉬운 풍경 15] 떠난 자리, 남은 꿈

중앙일보 2012.06.23 01:14 종합 15면 지면보기
강원도 평창, 2005 ⓒ강운구


서둘러 떠났다. 챙겼던 짐도 둔 채로,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라며 방문 잠가 두고 떠났다. 거기에 포스터, 오랫동안 방 안에 걸려 있었을 자동차가 있다. 그 위쪽 시계의 바늘은 정오를 막 지났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쯤까지 온 나라의 시골에는 빈집들이 늘어났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도시로 떠났다. 농업을 버리고 공업을 따라가며, 팔리지 않아 그냥 두고 갔는데, 남은 사람들은 버리고 떠났다고 했다. 이 시기에 농촌은 확 기울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렸다. 이 사진은 2005년에 찍었다. 그러므로 그 산업화에 따른 초기 이농은 아니다. 아마 남아 있던 노인이 자식들 집으로, 아니면 하늘로 떠났거나일 터이다. 승용차 포스터를 걸어 놓고 있던 이는 아마 아들일 것이다. 2000년에 발매된 이 차를 마음에 두고 있던 아들은 그러므로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하다.



 사진이란 직업엔 좀 수상쩍어 보이는 구석도 있다. 주인 떠난 빈집에 도둑처럼 들어가서 기웃거리는 것도 그렇다. 대문이 잠긴 집은 담 너머로 보고, ‘울도 담도’ 없는 버려진 집에는 마당, 때로는 방 안까지 들어가서 이 시대만의 어떤 흔적을 찾으며 현장 검증을 하기도 한다.



 시각에 호소하는 작품(회화와 사진과 그 밖의 여러 분야)이란 뭔지 한마디로, 아니 길게로도 설명하긴 쉽지 않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뭔지 모를 난해한 것이거나, 아니면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수가 많다. 그저 보기 좋고 아름다우며, 그걸 그리거나 만들거나 찍은 작가가 좀 유명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만족한다. 특히 ‘유명’이라는 것이 보다 큰 장식이 된다. ‘유명’은 그 작품 내용의 애매함도, 비싼 가격도 다 정당화한다. 벽에 거는 장식적인 것을 좋아하면서도, 사람들이 흔히 집착하는 것은 그 작품의 표현 방식보다는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의미’다. 시각적인 작품에서 뜻만을 따지다가는 놓치는 게 더 많다. 또한 그와는 달리, 너무 표현 방식에만 집착하다가 내포된 내용을 못 보게 되는 수도 있다. 균형- 건전한 상식은 대체로 멀리 있으므로, 사실 상식이 아니다.



 승용차 포스터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었던 장식이었다. 작가를 알 필요도 없이, 갖고 싶은 욕망이 담긴 차 모양과 브랜드는 훌륭한 장식이 될 수 있다. ‘예술작품’ 못지않은 역할을 이 포스터 작품이 빛바래도록 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바라던 차의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



 빛 밝은 한낮에도 떠난 자리는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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