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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 영국서 13박14일 … 펍~공연장~미술관서 찾은 ‘여행의 기쁨’

중앙일보 2012.06.22 03:17 Week& 2면 지면보기
장기하에게 여행은 …


호텔 바엔 비틀스 로큰롤
펍으로 가니 린킨 파크·오아시스 노래
흥겨워라, 리버풀의 밤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타게된 전철 창밖으로 바라본 풍경이, 문득 참을 수 없이 아름다운 것.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영국이었다. 히스로 공항 바닥을 밟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런데 그 흥분을 증폭시켜준 것은 다름 아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맥주 공장이었다. 아, 드디어 고대하던 브리티시 에일(British Ale)을 실컷 맛볼 수 있는 것인가! 숙소에 도착한 때는 밤 아홉 시 반쯤. 근처에 단 한 개의 펍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주택가를 지나 길 모퉁이에서 펍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생전 처음 영국에 도착해 최초로 한 일은 그렇게 에일 한 잔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펍에서 주문을 하기 위해 바 앞에 섰는데, 5~10개나 되는 서로 다른 브랜드의 생맥주 꼭지가 늘어서 있었다(나는 이 광경이 정말 좋다!). 이 꼭지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조금 작은 크기의 라거 맥주, 다른 쪽은 큼직한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는 에일 맥주 꼭지들이었다. 에일이라는 종류의 맥주는 영국 펍 문화를 대표하는 술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처음엔 별로 맛있지 않았다. 영국 펍에서 파는 에일이 미지근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온도에 바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그 풍부한 향과 시크한(?) 온도에 사로잡혔고, 여행하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에일을 마시러 펍을 드나들었다.



뮤지컬에 대한 기대가 은근 있었나보다. 몇몇 뮤지컬은 정말 별로였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의 감동은 아직도 쩌렁쩌렁하다.


바에 앉아 있는 동안 항상 나의 친구가 되어준 것은 ‘타임아웃 런던(Time Out London)’이었다. 런던의 문화 정보가 총망라된 주간지다. 여기에는 음악·영화·클러빙·무용·식당 등 각 분야의 모든 콘텐트가 풍성하게 소개돼 있다. 평가단이 뽑은 분야별 ‘이 주의 베스트5’가 게재되는데, 이게 아주 믿을 만했다.



세련된 남성성을 추구하는 그룹 겟 더 블레싱(Get The Blessing)은 내가 머무른 첫 주의 추천 공연 2위에 랭크돼 있어 나를 공연장으로 달려가게 했다. 여성 가수 리즈 그린(Liz Green)은 영국으로 떠나기 전 여행 기간 동안 볼 수 있는 공연을 마구잡이로 검색하다 마음에 들어 메모해 놓았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같은 주 5위에 올라 있었다.



이 잡지는 어떤 사심도 의도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었다.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평가단을 꾸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부러웠다. 공연의 장르·규모·인지도는 물론이고 ‘대세’와 무관하게 추천 순위를 매기는 그들의 방식은 충분히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며칠 동안 이 펍 저 펍을 드나들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원래 낮술 예찬론자이지만 런던 사람들은 왜 주중에, 특히 대낮에 펍을 이리도 많이 찾는 것일까?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영국인에게 물었다. 런던에서는 직장인의 점심시간이 두세 시간쯤 되며 그동안 펍에서 맥주 몇 잔 하다가 다시 일터로 돌아가 오후 업무를 보는 일이 흔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아니, 이런 천국이 있나! 문화적 충격이었다.



비틀스 스토리에 전시된 비틀스멤버의 밀납인형.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자 자동으로 그들의 음악이 귀를 가득 채운다. 비틀스 효과일까
낮술들 정말 즐긴다. 안주는 없고 이야기들이 안주다. 서서 마시고 싶거나 흡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야외 창가석으로 집합.
리버풀의 대표 클럽 캐번(cavern). 이곳에서 수많은 공연을 했던 비틀스는 여러 시도와 도전을 발판으로 끝내 음악적인 성숙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어딘가에서 공연을 봤다. 그 가운데 맨체스터 출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리즈 그린의 콘서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사라 본(Sarah Vaughan)이나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같은 전통적인 재즈 보컬리스트의 음색을 떠올리게 했다. 한편으로 강세가 확실하고 짧게 끊어 부르는 그녀만의 창법은 독창적이면서도 묘한 느낌이 났다. 노래의 멜로디는 귀여운 듯하면서도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팀 버튼(Tim Burton)의 영화에 삽입돼도 어울릴 것 같았다. 어쿠스틱 악기들로만 이루어진 편곡도 여백이 충분해서 좋았다.



그날 리즈 그린의 음악만큼이나 큰 인상을 준 것은 옆자리에 앉은 한 관객이었다. 공연 시작 십 분 전쯤에 백발이 성성한 영국인 할아버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이 20대 인디 뮤지션의 공연을 보러 온 것이 신기해서 슬쩍 말을 붙여보았다. 밥 딜런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좋아한다는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의 신인이 하는 공연을 찾아다니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접 워드 문서로 작성한 공연 목록을 보여 주었다. 서너 달 동안 런던에서 열리는 공연 중에서 관심이 가는 공연을 리스트로 만들어 꼬박꼬박 보러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는 갖고 있던 신문지 한쪽을 찢어 자신이 추천하는 공연장 이름을 적어주기도 했다. 영국 음악의 저력은 이런 두터운 저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루는 내셔널 갤러리에 들렀다. 런던에 있는 동안 맑은 날이면 트래펄가 광장의 벤치에 앉아 그곳 매점에서 산 ‘런던 프라이드’ 한 병을 따라 마시고 오후 여정을 시작하곤 했다. 내셔널 갤러리는 광장과 붙어있는 데다 무료 입장이라 시간 때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모네의 그림을 좋아해 인상주의 작품이 있는 방을 찾았다. 모네·마네·쇠라 등의 작품을 거쳐 벽 한 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두 폭의 연작 그림을 마주했다. 그때 내 발걸음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난생 처음 본 그 그림은 나의 오래 전 어떤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추억은 언제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가지고 있다. 좋은 기억도 추억이 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픔을 머금게 마련이다. 반면 안 좋은 기억도 추억이 되면 세월의 길이만큼 아름다움을 덧입게 된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눈시울을 붉히며 기립박수를 쳤던 ‘오페라의 유령’을 본 날, 오후에 리버풀로 향했다.



사실 리버풀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다녀온 이들에게 ‘정말 볼 것 없다’ ‘비틀스와 축구 빼면 쓰러지는 도시다’ ‘스트로베리 필드에 가면 그냥 공원이 하나 있고 페니 레인에 가면 그냥 길이 하나 있을 뿐이다’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버풀에서의 이틀은 원인 모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리버풀은 내게 이번 여행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의 발견)였다. 세렌디피티는 혼자 하는 여행이 주는 가장 짜릿한 선물이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여행 중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마련인데, 그것이 좋은 쪽일 경우 그 순간은 여행의 절정으로 기억되곤 한다. 나는 워낙 길치다. 하지만 길치라서 내 인생에서 세렌디피티를 자주 마주칠 거란 예감이 리버풀에서 들었다. 혼자 한 여행은 무엇보다 진하고, 짧은 연애처럼 자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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