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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 주부, 연예인까지 … 짭짤하지요, 탁구와 노는 맛

중앙일보 2012.06.22 03:15 Week& 6면 지면보기
# “모자 선수, 잘하고 있어요. 별것도 아닌 서브도 못 받는 상대편!” 지난주 토요일 오후 5시 서울 종로타워 앞. 50~60명의 시선이 길거리 탁구 경기에 쏠려 있었다. 탁구채 대신 숟가락을 든 모자 쓴 선수가 요령 있게 공을 쳤다. 해설을 맡은 이가 잽싸게 농을 던지자 관중이 와르르 웃음을 쏟아냈다. 대다수가 20~30대였다.


100만 명이 즐기는 ‘국민레포츠’ … 라켓 든 젊음들 거리서 스매싱 대결

# 이튿날 비슷한 시각 서울 천호동의 한 탁구장. 아마추어 탁구선수 80여 명이 일요 정규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 각기 다른 동호회가 내건 현수막이 빼곡한 2층 난간 아래 탁구대 16개가 놓여있었다. 저마다 긴장감이 대단했다. “아마추어라도 10년 이상 경력자가 많아요. 40대가 제일 많지만 50대 이상도 20~30% 되지요.” 코리아탁구체육관 김영곤(49) 관장이 슬쩍 귀띔했다.



‘탁구의 시대’가 돌아왔다. 1970~80년대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던 탁구가 다시 국민 레포츠 자리를 노리고 있다. 생활체육이 생활화된 요즘 탁구장을 찾는 사람은 주부와 중장년층 이상 동호인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탁구 인구는 20~30대 젊은 층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2.7g 작은 공의 21세기형 저력을 week&이 들여다봤다.



글=나원정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정현숙 탁구교실, 주부 30여 만명 거쳐가



국자, 플라스틱병, 도끼빗, 프라이팬, 숟가락까지…. 탁구채 대신 기상천외한 도구를 든 길거리탁구 대회 선수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1999년 시위대 동선을 피해 종로타워 앞에자리 잡은 길거리탁구 대회는 이제 종로의 명물이 돼 20~30대 젊은이에게 즐거운 놀이로서의 탁구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매주 토·일요일 이곳에는 하루 70여 명이 몰린다.
국민생활체육 전국탁구연합회가 2010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탁구 인구는 2005년 50만 명에서 5년 만에 100만여 명으로 두 배 성장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생활체육 붐이 일어나며 동호회가 급격히 늘어난 덕분이다. 생활 탁구의 수준도 더 높아졌다. 예전에는 시간 때우기용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제대로 강습을 받아 실력을 키우는 매니어가 많다.



탁구 전문 사이트 ‘OK핑퐁(okpingpong.com)’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서 성업 중인 탁구장은 200곳이 넘는다. 전국적으로는 700 곳 이상이다. 한국길거리탁구리그 최진구(53) 대표는 “좁은 공간에 탁구대 서너 개뿐이던 예전과 달리 요즘 탁구장은 고급화·대형화 추세라 탁구대가 최소 10개는 있다”고 설명했다.



1990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부 탁구교실을 연 ‘사라예보 스타’ 정현숙(60)씨는 “그동안 탁구교실을 거쳐간 주부 30여만 명 중에는 국제심판 자격증을 딴 사람도 있다”고 소개했다. 김영곤 관장은 “정현숙 탁구교실을 시작으로 전국에 탁구 시설이 늘어나면서 주부들이 요즘 탁구 붐의 산파 역할을 하고 있다”며 “엄마들이 탁구를 치면 온 가족이 다 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엄마의 탁구 열성 때문인지 탁구를 가르치는 학교도 많다. 교육과학기술부 ‘2011년 종목별 학교스포츠클럽 등록 현황’에 따르면 탁구는 전국 각급 학교에 3144개 클럽, 8만1383명이 등록돼 있다. 100여 개 종목 가운데 줄넘기·축구 등에 이어 여덟째로 많다.



우리나라가 2009년부터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것도 탁구가 인기를 되찾은 이유다. 국민생활체육 전국탁구연합 김영진(58) 처장은 “시멘트 바닥에 합판 당구대를 두고 어설픈 탁구를 치던 어릴 적 향수에 젖어 찾아오는 어르신도 많다”고 말했다. 나이와 세대를 막론하고 온 국민이 탁구를 치고 있는 것이다.



실력 금세 늘지 않지만 도전정신 자극



2년 전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처음 탁구채를 잡은 개그맨 박성호는 이후 탁구의 매력에 푹 빠졌다. 아이스 하키나 축구 못지않게 운동량이 많아 체력 관리에도 좋다고 그는 귀띔했다.
요즘 서울에서 탁구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OK핑퐁’ ‘고슴도치 탁구클럽(cafe.daum.net/hhtabletennis)’ 등 탁구 전문 사이트에 접속하면 사설 탁구장이나 탁구 강좌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월 8만~10만원 회원비만 내면 사설 탁구장에서도 마음껏 탁구를 칠 수 있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탁구장은 그보다 반값 이상 저렴하다. 전용 탁구채와 장갑을 장만해도 모든 비용이 10만원 안팎이라 다른 스포츠에 비해 훨씬 부담이 없다.



탁구의 매력에 푹 빠진 유명인사도 꽤 많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소문난 탁구 팬이다. 1972년 당시 한일은행 탁구팀 박성인 감독이 이 회장의 ‘탁구 사부’였다. 정현숙씨는 “선수시절 북한 탁구팀과 처음 경기를 할 때 이 회장이 북한팀 경기 실황을 어렵게 구해줬다”며 “그만큼 탁구에 열정이 많은 분”이라고 회상했다.



배우 정은표(46)·오대규(44)씨 등과 함께 연예인 탁구단을 꾸린 개그맨 박성호(38)씨는 “탁구는 실력이 금세 늘지 않아 도전정신을 자극한다”면서 “순간순간 판단력을 요해 정신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영곤 관장의 탁구 예찬론은 제법 분석적이다. “골프는 날씨가 궂으면 못 치고, 테니스·배드민턴은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달립니다. 반면 탁구는 힘을 조금만 줘도 변화구가 생겨서 무리 없이 전신운동을 하면서도 재미있게 칠 수가 있습니다. 날씨에도 구애받지 않지요.”



종로 길거리 탁구대가 젊음 집합소로



탁구가 젊은이의 놀이문화에 들어온 데는 길거리탁구의 공이 컸다. 1999년부터 주말마다 서울 종로 보신각사거리 앞에서 열리고 있는 ‘종로 길거리탁구 대회’ 얘기다. 길거리탁구 대회 덕분에 주말마다 종로 거리는 탁구에 열광하는 젊은이의 집합 장소가 됐다.



“져서 아쉽지만, 재밌습니다!” 지난 9일 6연승자에게 도전한 30대 남자가 소감을 밝혔다. 최진구씨의 구성진 해설에 연방 깔깔대던 여대생 둘도 결국 다음 주 참가를 예약했다. 최씨는 “오늘은 날이 흐려 평소보다 구경꾼이 적은 편”이라며 “반응이 뜨거운 날은 스타가 탄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어느 직장인은 이 대회 명물 ‘엽기 핸디캡’을 잘 써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엽기 핸디캡’이란 경기 도중 4점 차이가 난 순간부터 앞선 선수가 탁구채 대신 상대 선수가 골라주는 도구를 쓰는 걸 말한다. 그 도구란 게 숟가락·프라이팬·빗자루, 심지어 맥주 2000㏄ 피처통 따위다. 승부에 집착하기보다 실력 차가 나도 재밌는 탁구를 하기 위해 고안한 규칙이다. 덕분에 20~30대의 반응이 열광적이라고 한다. 대학 때 처음 대회에 참가한 뒤 군 입대 후 휴가 때마다 찾아오는 군인도 있다.



최씨는 “일단 모든 취미는 즐거워야 한다”면서 “더 많은 젊은이가 탁구에 재미를 붙이는 그날까지 중계방송의 입담을 갈고닦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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