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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오지에서 땀 흘리는 경제 영웅들

중앙일보 2012.06.22 00:00 종합 29면 지면보기
한은화
경제부문 기자
인연은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겹쳐서 오는 모양이다. 오지(奧地)와의 인연이 꼭 그렇다. 2002년 근 1년 동안 중남미 여행 중일 때였다. 파나마를 거쳐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로 들어가려 하자 길에서 만난 콜롬비아인은 이렇게 말했다. “거긴 전쟁터다. 그런데도 가는 건 미친 짓이다.” 내전이 워낙 치열한 곳이어서 걱정해주는 말이었다.



 그의 만류에도 강행했다. 도착해서는 폭격으로 허물어진 건물과 군용 트럭에서 내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가던 군인을 봤다. 후회했지만,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페루에서는 고산병에 걸렸다. 안데스 산맥을 오르다 해발 4550m를 찍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남미의 척추’ 안데스 산맥에는 해발 6000m가 넘는 봉우리가 수십 개 있다.



 오지와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지난해 3월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섬으로 출장을 갔다. 국내 기업인들이 오지에서 벌이는 사투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이 섬에는 SK네트웍스가 조림 중인 고무농장이 있다. 여기서 열대림 정글을 고무농장으로 바꾸기 위해 본사에서 파견된 한국인들을 만났다. 이들의 캐릭터는 제각각이었다. 30년 넘게 자원개발 현장에서 보낸 60대 고문, 서울 본사에서 책상 근무만 하다 온 30대 과장, 오지 근무를 자처한 20대 신입사원…. 이들은 그간 겪은 우여곡절을 들려주면서 “자부심이 크다”고 입 모아 말했다. 농장 곳곳에는 이들의 땀방울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천막에서 시작한 숙소는 어느 새 그럴듯한 나무집으로 변했다. 언젠가는 정글이 고무농장으로 변해 우리나라가 싼값에 천연고무 원료를 획득하는 날이 곧 올 것임을 느꼈다. 그때까지 이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귀한 거름이 될 것임을 목격했다.



 21일 페루 헬기사고 희생자 영결식이 열렸다. 이 ‘8인의 영웅들’은 페루의 ‘블루골드’라 불리는 수력발전사업 첫 해외 진출을 타결시키기 위해 오지를 마다하지 않은 산업 일꾼들이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국내 기업인들은 미래 먹거리를 캐러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를 누빈다. 비단 남성들뿐이랴. 최근 취재하면서 만난 서른 살 여사원은 “최고의 오지 전문가가 되겠다”며 뿌듯한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오지 개척엔 엄청난 위험이 뒤따른다. 열병에 걸리거나 테러 위협은 다반사다. 전쟁터에서는 장갑차 무장 호위를 받으며 건설 현장을 누빈다. 블루골드 전사들처럼 때론 아까운 목숨도 잃는다. 그럼에도 우리 기업들의 행선지는 등 따습고 배부른 곳에서 오지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산업 전사들의 목숨 건 애국이자 또 다른 순국(殉國). 그 귀한 도전정신을 후배들이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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