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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나폴레옹

중앙일보 2012.06.07 00:00 종합 36면 지면보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대표 이미지는 백마를 타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는 모습이다. 신고전주의 미술의 대표 주자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가 그렸다. 다비드는 정치성향이 강한 예술가다. 프랑스 혁명 땐 자코뱅 당원으로 혁신파에 가담했다. ‘마라의 죽음’(1793) 등 혁명 정부의 수반을 영웅적으로 그렸다. 이후 나폴레옹에게 중용돼 미술계 최대 권력자가 됐다.



 이 그림,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1801)은 나폴레옹이 1800년 알프스를 넘는 모습을 용맹스럽게 묘사했다. 앞발을 치켜든 백마, 그 위에 탄 채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나폴레옹. 그가 폭풍우를 뚫고 준령을 넘으며 “나를 따르라” 외치는 듯하다.



 하지만 그림 속 모습은 사실이 아니다. 나폴레옹은 화창한 날, 지리를 잘 아는 현지인이 끄는 노새를 타고 겨우겨우 알프스를 넘었다. 그의 군대는 작전대로 불시에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습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절대적 병력 부족을 극복하긴 힘들었다. 한때 전멸의 위기에 몰렸으나 때마침 구원에 나선 드세 장군 덕에 신승(辛勝)했다. 금상첨화, 드세의 전사로 나폴레옹은 전승의 공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다비드는 ‘역사적 왜곡’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나폴레옹이 탄 말발굽 아래 바위엔 그의 이름, 보나파르트를 아로새겼다. 이어 그에 앞서 알프스를 넘었던 전설의 영웅들을 밑에 흐릿하게 적어 넣었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과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마뉴 대제다.



 타고난 ‘정치 예술가’였던 다비드는 왜 이렇게 이 그림에 공을 들였을까. 나폴레옹은 평민 출신으로 최고 권좌에 올랐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받았다. 세속의 승인만으로는 부족했다. 신성한 권위가 필요했다. 그림은 이 점을 간파한 다비드가 자신의 주군에게 바친 ‘성화(聖畵)’였다.



 나폴레옹은 누구보다 일찍 ‘이미지 정치’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재주를 십분 활용해 자신의 권위를 다졌고,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받들며 자신의 권력욕을 채웠다. 그러나 정치와 야합한 예술의 말로는 쓸쓸했다.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에 패했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돼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다비드 역시 추방돼 브뤼셀로 망명했고, 죽을 때까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지 정치’의 걸작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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