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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된 실수와 돌이킬 수 없는 불행, 결국은 …

중앙선데이 2012.06.02 23:52 273호 1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강일구
살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배우자의 결정으로 가족에게 큰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옳을까요. 이번엔 갑작스레 교통사고를 당해 아이가 장애를 갖게 된 어느 부부의 문제 해결법을 통해 고통 나눔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부 내용은 각색했습니다.

김현예 기자의 위기의 부부들 ③고통에 대처하는 방법

남편(57)의 이야기
그래,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소주병을 들어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발 밑에 있는 돌을 힘껏 굴렸다. 컥. 숨통이 조여온다. 아득해진다. 세상을 이렇게 하직하는구나. 눈앞이 점점 캄캄해질 때쯤, 나뭇가지가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을 맸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몸이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런 제기랄, 죽는 일도 마음대로 안 되네. 정신을 차린 김씨는 서러웠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은 ‘그날’부터였다. 1997년 2월이었다. 동해로 가족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전자제품 회로도 설계를 하는 회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차를 산 기념으로 1박2일 여행을 떠났다. 큰 마음을 먹고 아내와 아들·딸·장인·장모·처남까지 태우고 가는 길이었다. 산길을 돌아가던 중 옆 차선을 지나던 차량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운전대를 돌렸는데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가 났다. 정신을 잃었다가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팔이 부러졌고 유치원을 다니던 딸은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장인과 장모·처남은 중상을 입어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아내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아 아이들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 역시 소소한 부상 외엔 큰 문제는 없었다.

가족들의 병세는 빠르게 회복됐지만 딸아이가 문제였다. 병원에선 딸아이가 “성장판을 다쳐 기형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아는 형이 지방에서 병원을 한다며 “치료를 맡겨보라”고 했다. 난 아내를 설득했다. 지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 아무래도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아내는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유명 병원들은 몇 달씩 대기를 하는 게 일쑤이니 빨리 치료를 받게 하는 게 나은 것 아니냐”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고집을 굽혔고, 결국 내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치료가 시작됐고 1년여가 흘렀다. 하지만 딸아이의 다리는 낫질 않았다. 딸이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아내는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당신 때문에 딸이 장애인이 됐다”고 했다. 그날 그 사고에서 내가 크게 다치지 않았던 것이 최고의 불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갈등은 딸의 다리 문제로 시작해 내 일까지 뻗치기 시작했다. 전자회로 설계회사를 친구와 함께 차리고 난 뒤 한동안 사업은 잘 돌아갔다. 하지만 회로 설계에 목을 매는 나와 달리 동업자는 영업을 한답시며 술을 마시고 다녔다. 이대로는 동업을 할 수 없겠다 싶어 청산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간 내가 피땀 흘려 개발한 회로도를 들고 나왔다. 동업자는 날더러 ‘도둑놈’이라며 절도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재판에서 “훔치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엄연히 내가 개발한 회로도임에도 ‘회사 소유’라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한순간에 범죄자로 낙인 찍혔지만 아내는 내 편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이 판단력이 부족해 생긴 일”이라고 타박을 했다.

사업이 무너지고 나서 아내의 폭언은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2009년 5월이었던가. 한 달 이상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는 일로 아내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집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성기를 가위로 잘라버리겠다”는 말을 할 땐 참을 수가 없었다.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모멸감. 일주일이나 식사를 거부해 봤지만 아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세등등한 아내를 보는 건 수치스러웠다. 참다 못해 짐을 꾸려 집을 나왔지만 아내는 지난 3년간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아내(56)의 이야기
남편을 만난 건 내 나이 27살 때였다. 평소 고향 친구로 지내오던 그가 먼저 “정식으로 만나자”며 집 앞에 찾아왔을 땐 내 결혼생활이 이토록 불행해질 줄은 몰랐다. 50살이 넘어 법원에서 이혼소송 서류가 왔을 땐 기가 막혔다. 여자라도 생겼는지 집 나간 지 3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26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늘 참은 것은 나였다. 남편은 사고뭉치였다. 사업을 한답시고 멀쩡한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가더니 절도범으로 몰렸다. 알고 보니 동업자에게 말도 없이 회로도를 들고나왔던 거였다. 동업을 하면 자기가 개발했다 하더라도 회사 소유라는걸 모르고, 남편은 무조건 “내 것”이라고 우기면 되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97년에 있었던 교통사고도 그랬다. 본인만 빼고 친정 식구들이 죄다 중상을 입었고, 딸 아이가 성장판을 다쳤는데도 그는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교통사고 직후 서울에 있는 유명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면 딸아이는 장애인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극구 남편은 “아는 사람이 하는 병원으로 보내자”고 우겼다. 지방에 있는 작은 병원을 오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는 이런 사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우기지 못했던 건 치료비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 부담이 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성장판을 다친 아이는 다리를 절게 됐고, 학교에선 놀림거리가 됐다. 딸아이가 울고 들어와도 그는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아이 성격이 점점 위축되는 게 눈에 들어올 때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이는 생각이 늘 짧았다. 시댁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을 한다고 하니 큰돈을 버는 줄 알고 “돈 빌려달라” 손 내미는 일이 잦았다. 명절 때마다 시댁에 다녀오면 부부싸움은 당연지사가 됐다. 우리 집 형편 생각도 않고 거절을 못하는 남편은 무책임 그 자체였다. 사업을 하느라 집이며 예금을 내 앞으로 돌려놓은 것이 그나마 남편이 ‘잘 한’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딸 아이 다리 수술도 해야 하고, 아이들 대학 진학까지 목돈이 들 텐데 이혼을 해줄 순 없다. 이름만 부부로 살게 되더라도 내 가정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그 사람과 재산을 나눌 순 없다.

법원의 판단은
서울가정법원은 1심에서 김씨의 이혼청구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달랐다. 법원은 “김씨 부부는 이혼하는 것이 정당하다”며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26년간의 결혼생활이 이미 3년의 별거로 파탄난 데다 두 사람 사이가 회복되기 어렵다고 봤다. 이혼 책임에 대해선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아내가 평소 남편을 무시하고 폭언으로 모멸감을 줬다”고 설명했다. 남편 김씨에 대해선 “큰 교통사고로 처가 식구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등 아내로부터 불신을 자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슬기롭게 부부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물었다. 임종효 서울가정법원 판사는 “대형 교통사고와 남편의 기소라는 큰 사건을 통해 부부가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주거나 심리상담을 받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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