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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밑거름 된 장즈퉁 총독의 ‘후베이 신정’

중앙선데이 2012.06.02 23:36 273호 29면 지면보기
장즈퉁(왼쪽)은 외국인을 가장 많이 고용한 지방관이었다. 1906년 군기대신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18년간 후베이 신정(湖北新政)을 주관했다. 1903년 5월, 즈리(直隷) 총독 위안스카이의 정치고문 모리슨(G E Morrison)이 바오딩(保定)에서 영국군 장교와 만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 김명호]
1912년 2월, 대청제국 국무총리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공화제를 빌미로 여섯 살배기 황제를 퇴위시켰다.
쑨원(孫文·손문)은 “공화제를 실현시키면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 삼민주의(三民主義)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만주족을 몰아냈으니 민족주의는 성공했다. 민권에 관한 문제는 위안스카이에게 실험할 기회를 주면 된다. 나는 민생을 챙기겠다”며 임시대총통직에서 사임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2>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을 꿰찬 위안스카이가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청했다. 며칠간 코믹한 광경이 벌어졌다. 위안스카이와 대좌한 쑨원은 밤이 깊어도 천하대사를 논하자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뭐라고 떠들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하오(好)만 연발했다. 하품을 참으며 빨리 끝났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쑨원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연회석상에서 위안스카이가 “중산(中山)선생 만세”를 외치자 쑨원은 감격했다. “위안 대총통 만세”를 부르며 “10년간 대총통 자리에 앉아 백만 대군을 양성해라. 나는 철도 경영에 매진하겠다. 철길을 20만 리만 놓으면 중국은 부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며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쑨원은 진지했지만 위안스카이는 건성이었다. 쑨원이 돌아가자 주위 사람들에게 “사람 됨됨이는 나무랄 데가 없다. 생각이 나보다 앞서 있고 뜻도 고상하지만 실천력이 없어 보인다. 발기인 정도라면 모를까 나라를 맡기기에는 곤란한 사람이다. 해외에서 화교들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며 기부금 걷는 게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며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여건상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언젠가는 가능할 날이 있게 마련이다. 세월이 지나면 저런 사람들이 원견(遠見)이 있었다는 말을 듣는다”며 허탈해했다.
쑨원도 자신의 결점을 모르지 않았다. 위안스카이와 헤어진 후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을 찾았다. 6개월 전, 혁명의 첫 총성이 울린 도시에서 “난피(南皮)의 후베이 신정(湖北新政)이 없었더라면 신해(辛亥)년 거사는 불가능했다. 난피야 말로 혁명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과 인재(人才)를 마련한 사람이다. 혁명이라는 말을 한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는 대혁명가”라며 3년 전 세상을 떠난, 전 후광(湖廣) 총독 장즈퉁(張之洞·장지동)의 업적을 찬양했다. 장즈퉁은 원적이 즈리(直隷)성 난피였다. 흔히 장난피라고 불렀다.

1889년, 후광 총독에 임명된 장즈퉁은 전임지 광저우(廣州)에 세우려던 총기 제작창과 제철소를 한양(漢陽)으로 이전시켰다. 한양 병기창은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청 말에서 민국 초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보병들이 사용하던 총에는 어김없이 ‘漢陽造’ 세 글자가 선명했다. 1907년부터 신해혁명 3년 전인 1909년까지 한양병기창에서 생산된 무기와 탄약이 기·보병용 총기 13만 정, 각종 대포 986문, 실탄 6177만 발이었다.

장즈퉁은 제철소도 후베이로 옮겼다. 당시 “한양철창(漢陽鐵廠)”은 동양 최대의 철강기업이었다. 하루에 평균 60여t의 쇳덩이를 쏟아냈다. 장즈퉁은 교육과 인재 양성에 머리를 싸맸다. 현재 무한대학(武漢大學)과 화중농업대학(華中農業大學), 무한과기대학(武漢科技大學)의 전신인 서원과 학당을 개설하고 우수하건 못났건 해외유학을 권장했다. 1906년 후베이의 일본 유학생이 5000명을 돌파했다면 믿을 사람이 거의 없다.

불학무식한 부류들이 총기 가까이 있다 보면 폭도로 변하는 법, 장즈퉁은 군사학교(武備學堂) 학생들에게는 매달 은(銀) 4냥을 지급했다. 당시 농촌의 한 가구 일 년 생활비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대신 지저분한 행동을 하다 발각되면 그날로 내쫓았다. 후베이 무비학당 출신 중에는 일본 유학생이 유난히 많았다. 거의가 도쿄(東京)에 있는 동안 망명객 쑨원의 거처를 드나들며 민주사상을 접하다 보니 귀국 후 거사를 당연시 여겼다. 서태후가 “후베이의 인재 양성이 도를 넘어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려된다”고 할 정도였다.

후베이는 사병 수준도 중국 최고였다. 장즈퉁은 문화 수준이 낮은 청년들에겐 군복을 입히지 않았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신식교육을 일으키자 봉건 지식인들의 분화가 가속화됐다. 이들 대부분이 군문으로 몰려들었다. 사병 중에 지방고시에 합격한 수재(秀才) 출신들이 수두룩했다. 1911년 10월 10일의 거사를 “사병혁명(士兵革命)”이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장즈퉁의 성격도 거사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장즈퉁은 군벌(軍閥)형 인물이 아니었다. 위안스카이처럼 군대를 사병(私兵)화하지 않았다. 혁명세력들의 군대 잠입을 막았지만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조정의 질책이나 간섭을 초래할 정도가 아니면 크게 단속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는지, 정말 몰라서 그랬는지 그 속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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