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딱! 1000부 한정판으로 결실 맺은 지독한 ‘말러앓이’

중앙선데이 2012.06.02 18:25 273호 24면 지면보기
사랑하는 일을 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그 일에 뛰어들어 그 일을 업으로 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일로 밥을 벌며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 어디 그리 녹록하던가. 문학을 꿈꾸던 청년 가운데 어떤 이는 글을 쓰며 밥을 벌다가 문학에는 끝내 발을 담그지 못하거나, 호기롭게 문학에 투신했으나 밥을 벌지 못해 결국에는 문학을 떠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여기 돈을 벌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게 된 한 사내의 이야기가 있다. 길버트 캐플런이 그의 이름이다.
연주가 끝났음을 알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도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벼락 같은 감동이 그를 꿰뚫고 지나갔다. 명지휘자 레오폴트 스토콥스키가 이끄는 아메리칸 심포니가 연주한 구스타프 말러의 제2번 교향곡 ‘부활’을 만난 것이다.

숨은 책 찾기 <7> PHONO의 『말러 앨범』


그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에서 권위 있는 금융 잡지로 자리 잡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 매거진’을 설립해 성공한 후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꿈을 실현한다. 1983년 그때 그 연주가 벌어졌던 카네기홀에서 아메리칸 심포니를 지휘해 말러의 ‘부활’을 연주한 것이다. 호사가가 펼친 이벤트 정도에 그칠 수도 있었던 캐플런의 말러 연주는 이후 요청이 이어지며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는 본격적인 연구재단(Kaplan Foundation)을 설립해 전 세계에 흩어진 말러에 대한 자료를 모두 모았고, 말러에 대한 광범위한 저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줄리아드음대 야간학부의 교수가 되었고, 하버드대·옥스퍼드대 등 유수의 대학에서 강의했다.

지휘자로서도 세계 50개 이상의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아 말러 교향곡 제2번을 전문적으로 지휘해 갈채를 받았다. 그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말러 교향곡 제2번(코니퍼, 1987·1998)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판매된 말러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됐다.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음반(DG, 2002)도 발매 이래로 말러 제2번 교향곡의 음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5년에는 성남 아트센터의 개막 기념공연에 초청돼 KBS교향악단을 지휘해 역시 ‘부활’을 연주했다.

나는 이 책을 사진가 주명덕 선생님의 작업실 서가에서 처음 만났다. 1995년 출간된 『말러 앨범』의 초판이었다. 사진의 역사는 음악의 역사에 비할 수 없이 짧아 우리가 익숙한 작곡가를 풍부한 사진으로 만나기란 어렵다. 말러의 경우 비교적 많은 사진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난 사진가의 시선에 동참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

2010년과 2011년은 말러가 태어난 지 150년, 사망한 지 100년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캐플런재단은 초판 이후 수집한 자료들을 추가한 『말러 앨범』의 개정판을 지난해 출간했다. 사진뿐 아니라 말러의 뮤즈였던 부인 알마 말러가 말러의 동료 알프레트 롤러에게 의뢰한 글과 전 작품 목록, 생애 연표, 풍부한 사진 캡션이 더해져 말러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의 한국어판을 출간하고 싶었다. 에이전시를 통한 몇 차례의 가격 협상 끝에 우리는 출간을 포기했다. 여러 번 계산해보아도 우리 음악책 시장의 규모에서는 우리가 구상한 수준의 책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좋은 개정판이 나오길 바라고 출간되면 꼭 구입하겠노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출간하기 힘들겠다는 답을 보냈다. 재단에서 다시 제안이 왔다. 한국의 상황이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다며 재단에서 받는 로열티를 감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책을 내기로 했다.

‘샘이 깊은 물’ 편집차장이었던 말러리안 임선근씨가 번역을, 품위 있는 책꼴로 이름 난 디자이너 이영미씨가 디자인을, 고급 사진 인쇄 영역에서 뼈가 굵은 로얄프로세스의 신임호 전무가 색 분해, 제판 및 인쇄를 담당해 주었다. 여러 차례의 판형 제작, 용지 테스트와 시험 인쇄를 거쳐 마침내 매권 한정판 고유번호가 날인된 한국어판 『말러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지난 2월 13일 저녁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인 풍월당에는 100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 정신과 전문의 박종호 대표의 『말러 앨범』 강의 ‘말러의 회상’ 자리였다. 모두 사진 속 말러의 발걸음을 좇으며 음악에 취했다. 이로써 『말러 앨범』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이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