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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시선이 그리도 중요한가요

중앙선데이 2012.06.02 18:11 273호 32면 지면보기
어쩌면 부부 사이의 파탄은 테레즈가 바보처럼 순진해서 벌어진 비극인지도 모른다. 테레즈는 남편 베르나르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테레즈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남편 베르나르는 테레즈라는 한 여성을 좋아해서 결혼한 것이라기보다는 돈 많고 잘나가는 정치가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강신주의 감정 수업 <13> 명예욕, 혹은 사랑하는 이를 절망시키는 감정

그렇지만 테레즈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까. 테레즈가 남편 베르나르를 독살하려고 했었던 것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되찾으려는 절망적인 노력에서 나온 몸짓인지도 모른다.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자신의 소설 『테레즈 데케루(Therese Desqueyroux)』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일체의 외적인 조건과는 무관한, 오직 두 사람만이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독살이 미수에 그친 뒤, 양 가문은 모두 사태를 미봉하려고 애쓴다. 상황은 테레즈가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사실 테레즈가 원했던 것은 사랑 없이 영위되는 부부관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두 가문은 테레즈의 사랑과 행복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가문의 명예만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니 애초에 이혼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심지어 남의 눈을 의식해 별거마저도 힘들었다. 독살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예 실추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가식적인 삶만 이어지는 지옥 같은 나날 끝에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파리행 허락을 받아 혼자 살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때 남편 베르나르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느냐고 질문한다. 사실 독살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난 남편 베르나르는 아내가 집안의 재산인 소나무 숲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오해할 정도로 속물이었던 사람이다.

명예만을 추구하던 남편이 과연 이제야 테레즈의 내면과 직면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불행히도 테레즈가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는 순간, 베르나르는 아내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속물의 눈에는 속물만 보이는 법. 어떻게 베르나르가 테레즈의 순수한 욕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남편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렇게 덧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 테레즈는 이제 정말로 완전히 남편을 포기해 버린다.

“나는 솔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내가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왜 다 거짓처럼 들리는 걸까요?”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베르나르는 이 순간을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미친 여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사소한 면 하나하나까지 기꺼이 따져보고자 할 것이었다. 테레즈 역시 이 남자가 한순간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다시 영원히 멀어져 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테레즈의 절망이 안타깝기만 하다. 명예만 눈에 보이는 남편의 눈에 진정한 인간 사이의 유대와 사랑을 꿈꾸는 아내는 ‘미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테레즈에게 남편도 ‘미친 남자’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불쌍한 테레즈를 절망하도록 만든 남편 베르나르의 내면세계는 마지막 대화에서도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시키는 명예욕이란 감정의 실체다. 지금 베르나르는 아내의 분노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베르나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내의 절망보다는 오히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명예욕이다.

“단지 사람들의 기분에 들기 위한 이유에서만 어떤 것을 행하거나 피하려는 노력, 이런 노력을 명예욕(Ambitio)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 『에티카(Ethica)』)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만 의식하게 마련이다. 결국 베르나르와 같은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 몰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현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둘의 관계”라고 말이다.

나와 너를 제외하는 일체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슬픈 것은 우리도 점점 베르나르가 돼가고 있다는 현실 아닐까. 애인을, 부인을, 그리고 남편을, 혹은 아이를 사랑하는 짝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제3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려고 하니까 말이다. “오늘 옷이 왜 그러니. 너무 눈에 띄잖아.” “좀 조용히 말해요. 옆 사람들이 힐끗거리잖아요.” “성적이 이게 뭐니, 창피하게.”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명예욕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제2, 제3의 테레즈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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