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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시민 ‘힐링 캠프’로 거듭나는 동작동 현충원

중앙일보 2012.06.02 00:28 종합 18면 지면보기
현충탑 안 위패실. 유해를 찾지 못한 10만4000여 호국용사의 위패가 촘촘히 모셔져 있다. 대부분 6·25전쟁 전사자들이다. 오른편 동그라미 표시가 있는 자리는 94년 탈북 귀환한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위패를 직접 떼어 낸 자리다. [안성식 기자]


대통령 묘역 옆 ‘추모의 숲’

한강 보이는 최고 인기 쉼터

산책로에선 동네주민 조깅






현충일을 앞두고 묘역 단장에 나선 자원봉사자들이 이팝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가고 있다. 현충원은 경건한 묘역이자 푸름 가득한 ‘호국 공원’이다.
한강을 가슴에 품고 관악산 기슭 공작봉(孔雀峰)의 긴 팔에 포근히 안겨 있는 그곳.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원장 정진태). 16만9000여 위(位)의 호국 영령이 영면하고 있는 땅. 현충원은 가까이 다가가기엔 너무나 엄숙하고 경건해 보인다. 정문과 담장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숲에선 푸르스름한 영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시리도록 아픈 추도의 달 6월을 이틀 앞두고 찾아본 ‘국가의 성지(聖地)’ 현충원은 경건하면서도, 아늑하고 포근했다.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을 품어 안는 싱그러운 쉼의 공간. 현충원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삼가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희생으로 지킨 나라! 애국으로 보답하자’.



 정문 양쪽 벽면을 10여 개의 기다란 흑백 현수막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6일 57번째 현충일 추도식을 앞두고 묘역의 잔디 단장도 한창이다. 지난주까지 절정을 이뤘다는 이팝나무 하얀 꽃의 잔향이 막 깎아낸 잔디 냄새와 섞였다. 지중해의 포도밭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장병들의 비석. 그 규칙적 배열 사이에 꽃을 갈고 태극기를 꽂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일 뿐 담장 안쪽 넓은 세상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143만㎡(43만 평)의 어디부터 들러야 할까. 현충원에서 10년째 근무하는 이순남 현충원 주무관의 안내로 대령 이하 사병이 잠들어 있는 ‘장병묘역’부터 찾았다. 현충관 옆 29번 묘역에 외롭게 서 있는 비석들 사이로 나란히 선 비석 두 개는 ‘호국 부자(父子)’의 묘였다. 공군 박명렬(공사 26기·당시 31세) 소령과 박인철(공사 52기·당시 27세) 대위가 안장돼 있었다. 박 소령은 1984년 팀스피리트 훈련 도중 산화했다. 다섯 살에 아버지 박 소령을 잃은 박 대위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갔다. 공군 파일럿이 된 그는 2007년 서해상에서 야간훈련 도중 추락해 사망했다. 부자의 비석 앞 유리상자엔 박 대위의 여동생이 갖다 둔 오리 인형이 놓여 있었다.



 이 주무관은 “5년 전 안장식 때 박 대위의 할머니가 박 소령의 비석을 때리며 ‘왜 벌써 데려가느냐’고 원망하던 모습을 잊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 주무관이 “박 소령의 부인 이준신 여사는 공군미망인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남편과 아들의 삶을 대신하고 있다”고 전하는 순간,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 건너편 묘역의 육군 정시업 상사 묘비 위에 앉았다.



 ‘24853 1951년 3월 5일 순창지구에서 전사’. 비문의 전부다. 일련번호 ‘24853’은 인적 없는 골짜기에서 발굴돼 영면의 장소인 이곳으로 귀환한 ‘안장 순서’다. 계급 순서대로 묻힌 게 아니라서 장교와 병사들이 뒤섞여 있다. ‘개천지구에서 전사’ ‘금화지구 제23육군병원에서 병사’ ‘양양지구 제2이동 외과병원에서 전사’ ‘백학산에서 전사’ ‘연천지구에서 전사’…. 60년 전 6·25전쟁의 치열함과 참혹상이 이 짧은 비문들에 압축돼 있었다. 현충원 장병 묘역에는 5만4000여 위의 전사자가 안장돼 있다. 이 중 55% 이상이 6·25 전사자들이다.



 ‘24645 1951년 3월 8일 청평지구에서 전사’라고 적힌 육군 이남용 일병의 비석 앞엔 아직 마르지 않은 노란 프리지아와 장미 다발이 놓여 있었다. 가족들이 며칠 전 다녀간 듯하다. 6·25 전사자의 상당수는 미혼인 채 전장에서 사망한 청춘들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6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부모와 형제들이 사망해 무연고 묘지가 많이 생겼다.



 현충원은 기업·단체들과 협력해 ‘한 사람 한 송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기업·단체·개인이 묘역을 나눠 맡아 6개월마다 꽃(조화)을 갈아주는 캠페인이다. 시간이 지나면 퇴색해버리는 조화를 교체해 영현들의 외로움을 달래겠다는 취지다.



 장병묘역을 나와 현충문을 지나 현충탑으로 옮겼다. 현충원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이들의 눈에도 낯익은 장소다. 현충일 추도식 때, 외국 국가원수들의 참배 때, 정치인들의 신년 참배 때 TV에 나오는 그 제단이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제단 위의 이 헌시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짓고,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68년 국군 창설 20주년을 맞아 만든 제단 앞 향로는 6·25 전사자와 베트남 전사자들의 인식표를 녹여 만들었다.



79년 군에서 순직한 오빠 임채선씨의 묘를 찾은 여동생, 애국지사 유물 전시관 내부, 국군유해발굴단이 수거한 총알이 뚫고 지나간 녹슨 철모.(사진 위부터)
 현충탑 안은 영현이 가장 많이 모셔진 곳이다. 사망 사실은 확인됐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10만4000여 전사자의 위패가 빼곡하다.



 위패실 중앙, 탑의 중심에는 귀환하지 못한 이들이 하늘나라로 편안히 가기를 염원하며 만든 영현승천상(英顯昇天像)이 성스러운 형상으로 놓여 있다. 31m 탑이 곧 하늘길인 셈이다. 승천상 아래 지하공간에는 유해는 수습됐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69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돼 있다. 위패실에는 아들·아버지·형제를 조국에 바친 가족들의 한(恨)과 사랑이 가득하다. 위패 아래에 촘촘히 박혀 있는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10대 소년의 사진, 연희전문 학사모를 쓴 20대 후반의 청년 사진,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큰할아버지를 위해 손녀가 만들었을 법한 종이학, 누군가 놓고 간 작은 성모상,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아들의 편지…. 언젠가, 누군가 하나둘씩 놓아두기 시작한 그리움이다. 위패실 끝자리에서 만난 김성우(41)씨는 6·25전쟁 때 큰아버지를 잃었으나 전사 사실만 확인하고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는 돗자리를 펴고 제를 올릴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1년에 설과 추석, 현충일 세 차례 제를 지낸다고 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큰아버지를 잊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큰아버지의 사진이 한 장도 집에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2년 전 매일매일 초상화를 그리고 또 그리셨어요. 92년 돌아가실 때 품에 안고 가셨어요.” 김씨의 큰아버지는 ‘이등중사 김복돌’이다. 51년 3월 13일 경남 고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부산에 계신 아버지의 몸이 불편해 부천에 사는 제가 혼자 이곳을 찾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간곡한 뜻이기도 하고요.”



 오빠 정진섭 하사의 위패 앞에 선 정진애(74) 할머니는 “올해엔 오빠의 유해를 찾을까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위패소에 나와 있는 국군유해발굴단의 권유로 구강 세포를 떼어내기로 했다. 2000년부터 유해발굴단이 발굴해 놓은 7500여 구의 유해 속에서 오빠의 유해를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유해발굴단 차현웅 병장은 “유가족들이 집중적으로 이곳을 찾는 5월 말부터 6월 한 달 내내 단원들이 상주하면서 구강세포 등 유전자(DNA) 감식을 위한 시료를 채취한다”고 했다. 정 할머니의 오빠 정진섭 하사는 50년 겨울 입대영장도 없이 군에 갔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오빠를 찾을 기대를 내비치면서도 정 할머니는 이내 “20년 전 오빠의 이름과 군번을 전사자 명단에서 찾았는데, 그나마도 다행 아니냐”고 했다.



 위패가 놓여야 할 자리가 군데군데 비어 있는 장면도 보였다. 유해가 확인돼 묘역에 안장됐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포로로 잡혔다가 94년 북한에서 탈출한 조창호 소위는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위패를 직접 떼어낸 경우다. 조 소위는 당시 이병태 국방부 장관에게 “육군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신고합니다”라고 복귀신고를 했었다. 조 소위는 2006년 사망한 뒤 현충원 내 충혼당(납골당) 209호실에 안장돼 있다.



 점심때가 되자 현충원에 활기가 돌았다. 참배 온 중학생들과 50대 여성들이 그늘에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곳곳에 마련된 쉼터, 산책로엔 조깅화를 신고 걷고 있는 동네주민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요즘 현충원은 모임 장소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 주무관은 “96년 국립묘지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2009년부터 국민과 함께하는 ‘호국 공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행사도 자주 한다. 매달 마지막 목요일에 국군교향악단이 무료 콘서트를 충효관에서 열고 있다. 4월엔 현충원 명물인 수양 벚꽃 ‘행사’도 했다. 14일부터 21일까지 열린 벚꽃 행사엔 34만 명이 방문했다. 과거엔 아이들이 뛰어 놀아도 제지했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반긴다. 사실 현충원은 도심 속 보기 힘든 생태 공원이다. 현충원 중심을 가로지르는 현충천엔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1급수에만 산다는 가재도 계곡물에서 볼 수 있다. 후투티, 파랑새, 꿩, 박새, 청딱따구리…. 현충원은 새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묘역과 그 주변은 참배객들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이다.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소 앞엔 자목련 군락이 있어 봄날엔 더없이 수려한 공간이 된다. 자목련은 육영수 여사가 가장 좋아했다는 나무다.



 그 아래 조성된 ‘추모의 숲’도 주민들에게 인기 있는 쉼터다.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 묘역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등 역대 대통령의 묘역은 가장 많은 참배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현충원 오른편, 장군 2묘역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다 보니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으나 유해도 찾지 못하고 후손도 찾지 못한 133위의 애국선열의 위패가 모셔진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이 나타났다. 3·1 만세운동을 하다 옥사한 유관순 열사,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독립을 호소한 이상설·이위종 열사, 의병장 연기우 열사…. 연기우 열사의 위패에는 ‘추모, 곡산연씨 대동종친회’라고 적힌 리본이 달렸다.



 위패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는 종친회원들을 만났다. “전국에 2만5000~2만6000명밖에 안 되는 소수 성씨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종친들의 뜻이 더 큰 것 아니겠습니까. 20년 전부터 서울과 대전에 모셔진 95위의 호국영령을 매년 6월 찾아 뵙니다.”



 ‘포화속으로’란 영화가 있다. 학도의용군이 적의 낙동강 전선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포항여중 전투를 그린 영화다. 현충문 앞 겨레얼 마당 앞에 이들을 기리는 탑과 묘가 있다. 포항여·중고 인근 논두렁에 가묘 형태로 묻혀 있던 48위의 의용군 유해를 64년 이곳으로 옮겼다. 탑 뒤 둥근 달처럼 생긴 석조물 아래에 48위가 모셔져 있다. 6·25전쟁 때 5만여 명의 학생이 의용군으로 참전해 이 중 7000명이 꽃 같은 나이에 전사했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을 지나 정국교(橋)를 건너가면 유물전시관이 나온다. 애국열사들과 6·25전쟁·베트남전 전사자, 순직한 군인·경찰관·소방관, 국가유공자 등 이곳에 안장된 이들의 유품이 전시된 곳이다. 전시관 2층 왼쪽엔 “마지막 한 분을 모시는 그날까지…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라는 구호가 적힌 유물실이 있다. 국군유해발굴단이 격전지에서 유해와 함께 수거한 유품들이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녹슨 철모, 60년 동안 삭아버린 군화와 라이터, 인식표…. 그날의 총격으로 멈췄을까. 아니면 주인이 깨어나길 기다리다 지친 걸까. 2시45분40초에 멈춰 버린, 녹슨 손목시계 바늘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현충원 지킴이 차석용씨

“이곳에서 걸으니 혈당 낮아졌어요”






“휘파람을 불면 새들이 답을 합니다. 휘~익 한번 불면 삐릿, 휘~익 휘~익 하면 삐릿 삐릿.”



 서울현충원에서 8년째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현충원 지킴이’ 차석용(72·사진)씨. 그는 현충원의 새들이 모두 ‘호국 용사들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더 많은 국민들이 현충원에 와서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나라 사랑의 기(氣)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충탑에서 만난 차씨는 인터뷰를 요청하자 “봉사단 조끼부터 입어야 한다”고 했다. ‘정복’으로 격식을 갖추겠다는 얘기였다.



●어떻게 현충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나요.



 “흑석동에서 죽 살았습니다. 10년 전 혈당도 높고 건강이 너무 안 좋아 2년 동안 현충원에 와서 살다시피 산책을 했거든요. 그 사이 병이 모두 사라지고 이렇게 건강을 찾았어요. 현충원에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호국 묘역이라, 많은 생각이 드실 텐데.



 “해가 갈수록 호국 영령들의 고마움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돼요. 대한민국의 오늘, 이분들이 안 계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기억에 남는 일도 많으실 텐데요.



 “작년 이맘때죠. 전남 장흥에서 아침에 올라왔다는 할머니가 월남전 참전 용사의 묘에서 폐문 시간이 되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계셨어요. 아들과 떨어지기 싫어서라고 하더라고요. 그분을 설득해 겨우 서울 딸네 집으로 가시도록 차편을 연결해 준 일인데…. 기억에 남는 일이란 게 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대부분이에요. 정치권의 종북 논란이 불거진 요즘엔 전우의 묘를 찾아 통곡하는 상이 용사들도 많아요. 우리나라가 이래선 안 되는 거죠. 휠체어 탄 노병들이 이런 일로 눈물을 흘린다는 게 참….”



 차씨는 긴 집게를 들고 쓰레기 줍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1년 동안은 혼자서 했으나 당시 고경석 현충원장의 눈에 띄어 현충원의 협조를 받으며 ‘공식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3년 전 정진태 원장 부임 이후 ‘호국 공원’ 컨셉트를 도입하면서 행사도 많아지고 참배객도 많아지자 지금은 동작구 자원봉사센터 회원 20여 명과 행사 차량 안내, 청소, 참배객 안내 등을 하고 있다.



●언제까지 현충원에서 자원봉사를 하실 계획이신가요.



 “나는 국가 유공자도 아니고, 59년 제1 보충역으로 편입돼 병역을 마친 게 다예요. 하지만 현충원은 나에게 새 삶을 선사했어요. 난 호국 영령들이 고마워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할 뿐입니다. 죽을 때까지 봉사하려고 합니다. 뼛가루라도 이곳에 뿌려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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