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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200만원" 동네 뒷산 가는데 등산복 대박

중앙일보 2012.06.02 00:04 종합 28면 지면보기
가벼운 등산을 비롯한 야외활동이 인기를 끌면서 최근 2~3년 사이 서울 원지동 청계산 입구에는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가 기존의 막걸리집들을 밀어냈다. [김도훈 기자]


등산화는 독일제 ‘마인들’, 바지는 캐나다 ‘아크테릭스’, 재킷은 스위스 ‘마모트’…. 서울 원지동 청계산에서 지난달 30일 만난 회계사 김모(57)씨의 등산복은 한눈에도 남달라 보였다. 실례를 무릅쓰고 등산용품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일반인에겐 생소해도 매니어들은 이름만 들으면 다 안다”며 “모두 200만원 정도 되는데 이렇게 입는 사람이 많다”며 웃었다. 그는 이어 “평범한 브랜드 옷을 입은 친구들과 함께 사진 찍은 걸 보면 마치 그 친구들은 헐렁한 ‘추리닝’ 차림이고 나는 맞춤 양복을 빼입은 것처럼 차이가 난다”며 “한 번 사면 여러 해 입는데 조금 비싸도 좋은 걸 사는 게 남는 것”이라고 했다.

청계산 오르는데 200만원 등산복 … “남보다 번듯한 것 걸쳐야”
[Money&] 한국 아웃도어 시장 과열 왜



 요즘 웬만한 등산길은 패션쇼장을 방불케 한다. 형형색색 아웃도어를 빼입고 나선 등산객들 때문이다. 청계산은 지금 녹음이 한창이다. 하지만 푸르른 녹음도 눈부신 햇살도 등산복의 화려함을 따라가지 못했다.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서 환하게 차려 입은 50대 여성 등산객들을 만났다. 경기도 분당에서 친구 네 명과 온 김모(53)씨는 “요즘 산에 오려면 이 정도는 차려 입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 도열한 아웃도어 매장에서 김씨의 등산화·바지·티셔츠·재킷·배낭 등의 가격을 물었다. 대략 전부 합쳐 100만원 안팎. 고글과 모자, 스틱은 빼고서다.



 이름 좀 있다는 브랜드로 갖춰 입으면 100만원은 가뿐히 넘는 아웃도어 패션. 지금 한국의 산은 이렇게 차려 입은 등산객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소비하는 아웃도어 시장 규모가 지난해 4조원을 넘었다. 연간 아웃도어 판매가 약 11조원에 이르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인구 8200만 명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 달러를 넘는 독일도 아웃도어 시장은 약 3조원으로 한국보다 한참 아래다. 한국은 그렇게 인구와 경제 규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큰 시장이다. 그런데도 아웃도어 소비는 계속 늘고 있다. 일반 패션업체들은 경기 때문에, 또 종잡을 수 없는 날씨 때문에 옷이 안 팔린다고 난리인데 아웃도어 의류만큼은 쑥쑥 성장하고 있다. 올해 국내 시장 규모는 5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까지 할 정도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누구는 말한다. ‘주 5일제 여가 문화가 자리 잡은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옛 얘기다. 주 5일 근무제, 아니 쉬는 사람 입장에서 ‘주 2일 휴무제’가 자리 잡은 게 벌써 7, 8년 전이다. 3, 4년 전에 ‘주 5일제 덕’이라고 했다면 수긍을 하겠지만 이젠 그걸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전문가들은 우선 국토의 3분의 2가 산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든다. 어디서든 차로 한 시간만 가면 오를 산이 있다. 게다가 그중 60% 정도는 간편한 복장으로 한두 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이다. 굳이 등반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사리 오를 수 있는 산이 산지사방에 널렸다. 다른 나라보다 아웃도어 수요가 클 수 있는 요건이다.



 주 5일제가 실시되자 이렇게 많은 산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오르게 됐다. 그러면서 최근 들어 한국인 특유의 ‘지기 싫어하는’ 문화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남은 번듯한 것 걸쳤는데 나라고 질쏘냐’ 하는 심리다. 일종의 ‘폼생폼사’다. 실제 지난달 30일 청계산에서 만난 주부 김민영(56·서울 서초동)씨는 “산에 오면 친구와 자꾸 옷 입는 경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12만원짜리 반팔 셔츠를 새로 구입했다. “나보다 뚱뚱한 친구가 입었는데 날씬해 보여 똑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살짝 바꿔 그 친구 몰래 샀다”고 했다.



 절대 혼자 산에 가지 않는, 친구나 동호인들과 몰려 산에 올라가는 풍토는 이런 심리를 더 부추겼다. 새 옷 사면 자랑을 하고,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이 이내 경쟁하듯 구매를 하는 것이다.



 국내 아웃도어 소비층은 이런 고가 경쟁 구매를 감당할 만큼 경제 여력이 있는 40·50대가 주를 이룬다. 노스페이스 청계점의 유진관 대표는 “40대 중반부터 60대 초반이 주 고객”이라며 “좀 비싸도 ‘나한테 이 정도도 못 쓰겠느냐’고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자녀를 다 키워놓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오른 중년들이 자기만족용 소비를 한다는 것이다. 코오롱스포츠 양문영 차장은 “중년들일수록 브랜드에 더 민감하다”고 했다. 그는 “산에 오르는 아주머니가 입은 재킷 손목에 ‘고어텍스’ 표시가 없으면 아저씨가 손도 안 잡아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이런저런 요인이 겹쳐 한국은 지금 ‘히말라야에 어울리는 기능성 아웃도어 의류를 뒷산에 가면서 입는’ 나라가 됐다.



 아웃도어 열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요는 점점 더 비싼 명품 아웃도어로 옮겨 붙고 있다. 마모트나 아크테릭스, 몬추라 같은 이른바 ‘하이엔드’ 브랜드다. 매니어들 사이에 ‘맨 마지막에 가는 곳’으로 꼽히는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 점포가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도 있다. 이곳의 하이엔드 브랜드 매장에선 ‘중등산화’라 불리는, 목이 높은 등산화가 한 켤레에 57만원이었다. 고어텍스 재킷은 89만8000원, 여름용 바지가 29만원 정도에 팔렸다. 웬만한 고급 브랜드보다 품목별로 10만~30만원 비싼 가격이다. 한 수입등산용품 판매점장은 “다른 브랜드와는 무릎을 굽히거나 움직일 때 살갗에 닿는 느낌부터 다르다”며 “그저 단순히 뽐내려고 이런 옷을 입겠느냐”고 반문했다. 이곳에서 만난 박모(61)씨의 얘기도 비슷했다. “기능은 거기서 거기겠지만 국내 브랜드는 입으면 축 처지는데 여기 옷은 때깔이 다르다”는 것이다. 박씨는 “나이가 들수록 시커멓고 우중충한 옷을 걸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런 브랜드를 찾는다”고 했다.



 해외에서 직수입한 하이엔드 브랜드의 아웃도어는 애프터서비스(AS)가 마땅치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런 옷만 전문으로 수선하는 업체가 생겼다. 서울 청계5가 방산시장의 ‘윤기네 수선’ 같은 곳이다. 윤기네 수선을 운영하는 조은순(여)씨는 “요즘 중년들은 고가의 아웃도어를 입을 때 한 치라도 품이 남는 것을 보지 못한다”며 “몸에 꼭 맞춰 맵시 있게 입으려다 보니 수선이 잦다”고 말했다. 고가의 아웃도어 수선은 기능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단이나 품만 줄이는 게 아니라 옷을 해체해 다시 붙이는 식으로 이뤄진다. 일반 수선소에서는 엄두를 내기 힘든 고난도 작업이다. 조씨는 “아웃도어는 한 벌당 6~8가지 원단이 들어간다”며 “한 번은 옷에 보지 못한 원단이 섞여 있어 물었더니 옷을 뉴질랜드에서 180만원 주고 샀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아웃도어 시장이 커지면서 최근엔 LG패션·LS네트웍스·제일모직 같은 대기업들이 잇따라 아웃도어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아웃도어 업체들은 최근 들어 새로운 시장을 넘보고 있다. 바로 어린이 시장이다. 올해부터 매주 토요일 학교가 쉬게 되자 부모와 함께 산에 가는 어린이 수요가 늘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고생은 학원에 가야 할 터여서 초등생에 초점을 맞췄다. 게다가 한국인은 100만원을 호가하는 유모차를 턱턱 살 정도로 ‘내 아이가 남보다 못한 것은 눈뜨고 못 보는’ 성미 아닌가. 그래서 아웃도어 업체들은 유아용 프리미엄 시장을 유망한 신성장 분야로 보고 있다. 아이더와 K2, 노스페이스 등이 올해 처음으로 8~12세용 등산용 재킷이나 티셔츠, 레인코트 등을 내놓은 이유다.



 희희낙락 아웃도어 업계지만 내부에서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고가의 고기능성 제품이 많이 팔릴수록 미국의 듀폰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이라는 얘기다. 고어텍스는 물이나 바람이 밖에서는 안 들어가지만 안에서 밖으로는 배출되는 소재로 듀폰이 개발했다. 고어텍스 소재는 모두 듀폰이 공급하며 고어텍스를 사용해 만든 제품도 듀폰의 인증을 받아야 판매할 수 있다.



장정훈·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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