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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뒤죽박죽 이 세상, 도량형은 세상을 잡는 권력이었다

중앙일보 2012.06.02 00:00 종합 34면 지면보기
측정의 역사

로버트 P 크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356쪽, 1만8000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지배하는 ‘척도(尺度)’의 역사와 방식, 문화·사회적 관계를 분석한 책이다. 최초의 측정도구였던 인체에서 ‘세슘 133 원자의 초미세 갈라지기’(초·秒), ‘진공 뀌기까지 과정을 살핀 이는 미국 물리학회 회원이기도 한 철학교수.



 그에 따르면 척도의 요건은 접근성·적합성·신뢰성 세 가지다. 예를 들면 최초의 단위 기준이 인체였단 이유는 접근성 덕분이다. 그러기에 중국의 척(尺)은 인간의 발 길이를, 촌(寸)은 엄지손가락 굵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신뢰성 또한 납득이 간다. 지역·시대마다 도량형의 기준이 다르다면 경제를 비롯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됐을 것이다. 프랑스 국가기록원에 m와 ㎏의 기준이 되는 표준원기가 소중히 보관된 이유다. 하지만 척도는, 그리고 그 성립과 사용 과정은 ‘비교 단위’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선다.



사람의 신체를 사물의 크기를 재는 기준으로 사용한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척도(尺度)다. 산업 디자인에 인체 척도를 응용했던 미국 디자이너 헨리 드라이퍼스(1904~72)가 저서 『사람을 위한 디자인』과 『인간의 척도』에 재현한 한 쌍의 인체 모형 ‘조’(왼쪽)와 ‘조제핀’. 인체 각 부위의 비율을 정밀한 수치로 표현했다. 드라이퍼스는 “가장 효율적인 기계는 사람 위주로 제작한 기계”라며 인체 척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진 에이도스]


 고대 중국에서 척도는 철학이자 문화였다. 예로 한나라 때는 제례를 논하고 천체 운행, 악법 같은 제의적 체계의 수리적 관계를 해석하는 상수학(象數學)이 꽃 피었다. 음악에서 길이를 끌어냈고, 악기 황종관을 채운 검은 기장으로 부피 단위를 정의했다. 서아프리카에서 금가루의 무게를 달 때 쓰는 저울추인 금분동은 지식의 총체를 담은 백과사전이자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다.



 또 포르투갈 선원에게 금을 강요당한 아칸족 족장은 악어가 새겨진 금분동을 꺼내 백인의 ‘거래’에 응했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악어를 뜻하는 금분동을 사용해 주위에 있던 장로들에게 ‘이들 포르투갈 뱃사람들은 무서운 존재’라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척도는 권력의 의지였고 정치의 산물이기도 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도량형 통일을 시도했다는 것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프랑스 혁명 전야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에 제출된 탄원서에는 “영주가 기존 도량형을 악용해 농민을 수탈한다”며 ‘길이도 하나요, 무게도 하나’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이성적이고 평등하고 보편적인 사회를 꿈꾸던 혁명세력은 도량형 통일에 나섰고, 자기네 표준을 모든 나라가 채택하도록 설득하고 싶었던 프랑스 아카데미는 프랑스어 대신 ‘척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메트론’에서 유래한 ‘미터’를 기본 길이 단위로 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교역 관계에 있으니 도량형 개혁에 대해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으며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이로울 것”이란 탈레랑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미터법 대신 야드- 파운드법을 고수한 큰 이유는 프랑스의 혁명 열기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척도는 또 경제의 도구이자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근대 기계문명의 발달은 정밀화와 표준화를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대량생산과 상호 부품교환 등이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 계기는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혁신적 측정기기가 여럿 선보였지만 각국의 도량형이 달라 우수성을 비교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십진법 체계를 택한 미터법이 중요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1869년 황제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미터법을 확산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에는 25개국이 참여했고 브라질 등 중남미 8개국이 미터법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가 “표준 전쟁은 끝났다. 승자는 미터다”라고 선언한 것도 이때다.



 무엇보다 척도는 과학이다. 특히 미터법이 그렇다. 책에는 변하지 않는, 그리고 복원할 수 있는 표준 척도를 만들기 위해 자오선의 길이란 자연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여정이 상세하게 펼쳐진다. 예를 들어 1988년 국제 킬로그램 표준원기의 질량이, 기포가 빠져나가거나 화학반응으로 변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플랑스 상수 h로 재정의 되는 과정이 세밀하게 서술됐다.



 ‘거의 모든 측정의 역사’를 다룬 듯한 이 책은 탄탄한 번역과 편집의 노력에 힘입어 무심코 쓰는 척도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미터법이 큰 비중을 차지한 탓이다.



 미터법의 역사를 파헤친 『만물의 척도』(사이언스북스)나 측정의 문화사적 의미를 분석한 『수량화 혁명』(심산)과 함께 견주어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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