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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칼럼] 아무거나를 외치는 취향 상실의 사회

중앙일보 2012.06.02 00:00 종합 41면 지면보기
조수인
국민대 실내디자인학과 4학년
고리타분한 교수님과의 회식시간, 음식 주문은 모두 두어 가지 메뉴로 통일된다. 이런 자리에선 괜히 혼자 특이한 것 시켰다가 눈칫밥 먹기 십상이다. 회사에서 회식 자리에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으리라. 그 누구도 배고픈 상사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을 것이며, 괜히 까다로운 식성으로 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내 취향을 여기서만큼은 버린다. 그런데 정말 여기서뿐만일까. 유독 ‘아무거나’를 외치는 그네들이 많다. 음식·여행지·영화를 고를 때도, 그 어느 것을 고를 때도 우리들은 쉽사리 ‘아무거나’를 구호처럼 외친다. 어쩌면 우리는 내 취향을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의 과정조차 잊은 채 자동반사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일까. 한국이라는 특수한 사회는 ‘아무거나’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것일까.



 ‘오덕후’, 오타쿠(특정 관심사에 대해 극도로 깊이 빠져들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라는 일본어를 낮추어 부르는 우리 식 은어다. 우리는 틈만 나면 ‘~덕후, ~덕’ 하는 식으로 ‘튀는 사람’을 지목한다. 그 외양도 가지각색이다. 예전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한정된 단어였으나 오늘날에는 유행처럼 ‘컴덕’ ‘화력덕후’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스스로를 기존의 틀에 맞추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공장의 완제품처럼 변해 버렸나.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회가 됐다.



 취향을 빼앗긴 사회, 그러하기에 우리는 지독히도 답답한 새장 속의 새인지마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



누구나 같은 목표를 바라본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은 대기업을, 중·고등학생들은 전교1등을. 아니라고 반항해 보기도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단 하나의 목표. 다양한 끼를 타고난 어린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가서는 안 되는 가치에 희생당하는 제물이 된다. ‘일등, 최고’라는 단 하나의 집단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패배자로 전락하며, 쓰라린 좌절감에 목숨까지 버리기도 한다. 수많은 어린 학생의 자살 원인이 얼토당토않은 ‘학업 부진’이라는 사실, 국내 유수 대학교 학생들의 연이은 비극, 이들을 짓누른 그 무엇인가가 정말 목숨까지 바칠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



 ‘인재’가 가장 귀한 자산이라는 이 좁은 땅 대한민국에서 밝은 미래를 책임질 아름다운 청춘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일은 없어야 한다. ‘창의적인 사회’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포용할 줄 아는 것이다. 각자가 관심 있고, 잘하는 것을 도와주면 스스로도 신이 나서 더 열정적으로 임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아닐까. 실제로 ‘미술 치료’라는 명목 하에 아이를 ‘치료’했다가 신선한 아이만의 시각을 잃게 하고 이를 평범하기 그지없도록 만든 사례도 허다하다고 한다.



 기존의 시각을 주입하기에 바쁜 어른들이 있다면 부탁한다. 청춘들만이 가진 독특한 시선을 다시 한번 바라봐 달라고. 분명 캐지 않은 원석처럼 빛나는 면모가 다시 보일 것이라고.



조수인 국민대 실내디자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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