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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칼럼] 공영방송, 제도인가 사람인가

중앙일보 2012.06.02 00:00 종합 43면 지면보기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참 이상하더라.”



 그저께 한 상가에 다녀온 지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보진영 인사가 상을 당해 많은 사람이 문상을 왔다. 주로 학계·언론계·노동계 인사들로, 대다수가 진보·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지인은 두 시간 넘게 상가에 머물렀는데, 어느 자리 누구도 사상 초유의 언론사 동시파업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모르거나 관심 없을 분들이 아닐 텐데 말이다.



 MBC는 파업한 지 벌써 넉 달이고, KBS·YTN·연합뉴스가 뒤를 잇고 있다. 노사 간에 중징계와 고소·고발이 난무한다. 정치권이나 방송 관련 기구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법도 한데 그저 시늉에 그친다. 섣불리 손대기엔 너무 뜨거운 감자인가. 정치권이 미적대는 것은 일반 국민의 무관심을 간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파업으로 불편한 것은 딱 하나, ‘무도’(MBC 무한도전)가 방영되지 않는 것뿐이라는 정서다. 뉴스? 스마트폰이나 PC를 열면 다 나온다. 드라마? 케이블 채널에서 입에 맞게 골라 볼 수 있다. 20년 전만 해도 지상파가 파업하면 온 대한민국이 흔들렸다. 그러나 다매체·다채널 시대의 시청자로서는 크게 아쉬울 게 없다. 이러니 공정방송 구현이라는 파업 본래의 목적보다 노조를 탈퇴해 뉴스데스크 앵커로 복귀한 배현진 아나운서와 그를 비판했다가 사과한 김수진 기자의 공방전이 인터넷에서 더 주목받는다. 많은 이들이 김재철 MBC 사장의 개인비리 의혹에 혀를 차면서도 그게 과연 파업의 본령에 해당하는 이슈인지 의아해 한다.



 오죽하면 파업을 했을까. 월급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공정방송을 하자는 파업이다. 특히 해고 같은 중징계는 사람의 생계와 일터를 동시에 앗는 극단적 조치다. 같은 언론인으로서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러나 이례적인 파업을 대하는 일반 시민의 이례적인 무관심에는 다른 코드가 하나 더 숨어 있다고 본다. 과거 파업의 ‘불의 대(對) 정의’ 구도가 많이 희석됐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는 불의와 정의,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받아들여지던 모양새가 몇 년간의 학습효과를 거쳐 ‘힘 대 힘’ ‘세력 대 세력’ 구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언론학회가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편파적’이라고 평가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 관련 방송 같은 게 대표적인 학습교재다. 게다가 공정방송에 앞장서겠다던 노조 출신 방송사 사장은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고, 후임 사장은 퇴임 후 여당 후보로 도지사 선거에 나서고, 앵커 시절 여당을 공격하던 분은 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러니 불의·정의 아닌 세력·진영 간 다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상 유례없는 동시파업에도 정치적 외피가 씌워지는 것이다.



 기왕에 벌어진 파업이라면 사장 한두 명 쫓아내는 것 말고 공영방송 지배구조 혁파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KBS·MBC 같은 공영방송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최대한 독립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당대 권력은 물론 당대 권력에 대항하는 안티(anti)권력 내지 미래권력에도 종속되거나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신문기자 출신 정연주씨가 KBS 사장이 되고 역시 신문기자 출신인 최시중씨가 방송통신위원장이 되는, 그래서 방송권력이 정권의 부속물 노릇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정권은 노영(勞營)방송이라 하고 노조는 어용방송이라 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당장은 대통령과 여당이 방송통신위원회·KBS이사회·방송문화진흥회를 장악하도록 짜인 현행 제도부터 손보아야 할 것 같다. 방송사 파업에 대한 정치권의 미지근한 태도에는 터놓고 말해 연말 대선에서만 이기면 모든 게 우리 것이라는 속셈도 숨어 있지 않겠는가.



 더 큰 문제는 제도 개선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들 BBC와 NHK 모델을 말하지만 두 방송도 문화미디어스포츠부(영국)·총무성(일본) 등 정부의 강한 입김 아래에 놓여 있다. 제도보다 방송사 구성원, 정부의 의지와 양식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오스트리아는 최근의 우리처럼 양대 정당(사회당·국민당)이 번갈아 공영방송(ORF)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거대정당의 손을 안 타려고 2001년 ORF를 공익재단으로 바꾸고 재단이사회를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재단이사회 구성이 여전히 정치권의 영향을 받는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제도보다 사람이 더 문제라는 방증이다. 그래서 나는 “공영방송 문제의 근본은 정치문화”라는 강형철(숙명여대)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 “명색이 지식인인데 KBS·방문진 이사들은 어쩜 그렇게 로봇처럼 지내는지 모르겠다”는 이재경(이화여대) 교수의 탄식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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