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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범인 잡는 건 경찰만이 아니다

중앙일보 2012.05.31 00:00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정봉
사회부문 기자
20대 여성이 서울 보문동에서 괴한에게 납치됐다 51시간 만에 풀려난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경찰의 검거 작전은 발 빨랐다. 신고를 받자마자 서울지방경찰청과 서울시내 31개 경찰서 형사가 동원돼 검거에 나섰고 사흘 만에 범인을 붙잡았다. 이 사건에서 범인 검거에 작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과소평가된 부분이 있다. 바로 우리의 금융시스템이다.



 범인은 은행 계좌에 입금된 돈 1000만원을 인출하기 위해 무수한 현금인출기를 돌아다녀야 했다. 현재 한 계좌에 대해 현금인출기로 뽑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은 하루 600만원이다. 한 번에 인출할 수 있는 금액도 최대 100만원이다. 일부 현금인출기는 30만원만 뽑을 수 있도록 돼 있다.



 범인은 돈을 인출하기 위해 10곳 이상의 현금인출기를 돌아다녀야 했다. 범인이 쉽게 달아나지 못하도록 금융시스템이 시간을 벌어 준 셈이다. 18일 오후 3시 돈을 인출하기 시작한 범인은 길목을 지키던 경찰에게 4시간45분 뒤 붙잡혔다. 7군데의 현금인출기에서 총 610만원을 뽑은 시점이었다.



 이 사건을 보며 지난 3월 송파경찰서가 수사한 보이스피싱 사기사건이 떠올랐다. 범죄를 막기 위한 금융시스템이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일부 금융회사의 안이한 대처가 이를 무용지물로 만든 사례이기 때문이다.



 당시 보이스피싱 조직은 4개월간 범행에서 현금카드 102장을 사용했다. 놀라운 건 대부분의 현금카드가 농협의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농협 관계자는 “전국 5600개 지점에 고객 수만 3700만 명에 달해 단순히 숫자상으로 많은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의 말은 다르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는 “올 1월부터 시행된 법령에 따르면 금융회사가 긴급하거나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입금·송금 계좌에 대해 지급정지를 요청할 수 있지만 농협은 소홀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득이한 사유’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지급 정지는 금융사의 판단에 기대고 있다. 금융사가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제도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지급 정지가 금융사의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회사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사회는 다양한 구성원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다. 한 군데 이가 빠져 있다면 톱니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보이스피싱 사기단은 그 틈을 이용해 보다 편하게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금융사의 안이한 생각과 대처로 인해 피해를 받는 건 단돈 100만원이 피 같은 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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