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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성공담이 듣고 싶은 당신께

중앙일보 2012.05.30 00:00 종합 34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적당히 배가 나온 중년의 당신. 당신은 오늘 특별한 사람과 만날 예정이다. 먼저 그가 쓴 책의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25년간 나는 내가 속한 일상과 내가 속하지 않으면서 연구 대상이 된 사람들의 일상을 오가야 했다. 계속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한 셈이다.”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대체 무슨 얘기지. 하지만 조금 더 들으시라. 어쩌면 당신의 젊은 날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은 잊혀진 그 시절의 기억과.



 책의 제목은 『사당동 더하기 25』. 저자는 올해 동국대를 정년 퇴임한 조은(66) 교수다. 여성 사회학자인 그는 1986년 사당동 재개발지역에서 만난 금선 할머니 가족이 상계동 영구임대아파트로 옮겨간 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추적해왔다. 책에는 할머니부터 아들, 손자·손녀, 증손까지 4대에 걸쳐 도시 빈민의 삶이 대물림되는 과정이, 그 비루하고 내밀한 풍경이 그려진다.



 책과 부록인 다큐멘터리 DVD, 그 갈피마다 눈길을 끄는 건 연구자의 모습이다. 분당에서 중산층의 삶을 사는 조교는 임대아파트를 방문하면서 ‘머리가 깨지게 아프고 토할 뻔한’ 경험을 한다. 가난의 지독한 냄새 때문이다. 조 교수는 카메라가 없던 이들에게 “왜 가족사진이 없냐”고 묻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이 가족에게 더욱 극적인 사건이 안 생기나’ 기대하게 되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제 조 교수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신문로의 찻집. 당신은 그와 나의 문답을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된다.



 - 연구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은.



 “처음엔 그들의 세상이 궁금해서 따라다녔는데 한계 같은 게 느껴졌다. 나처럼 대학 교수를 하는 이들은 출신 배경 때문에 중산층 이상의 사고 틀에 매여 있다. 그런 프레임(frame)으로 그들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이 계속됐다.”



 - 어떤 프레임을 말하는지.



 “할머니 손녀는 유산할 돈이 없어 할 수 없이 또 아이를 낳는다. 막내손자는 ‘대포차’ ‘대포폰’ 만드는 데 명의를 빌려주고 수배를 당한다. 가진 게 맨몸밖에 없고 사나흘을 버틸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중산층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건 문제가 있다.”



 - 앞으로도 가족 연구를 계속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 속에 들어가 대신 발언을 해주는 게 사회학자의 직분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이 얘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조 교수는 답한다. “이런 빈곤층이 전체 가구의 15%를 넘는다. 계층 간 이동 통로마저 닫히면서 사회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와 정책 입안자가 이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길 바랄 뿐이다.”



 실제로 ‘사당동’은 어떤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냉정하고 집요하게 보여줄 뿐이다. ‘가게 주인’이 더 이상 가난한 가장들의 꿈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TV 멜로드라마의 ‘연애각본’을 흉내 내며 도피처가 될 남성을 좇아 가출하는 엄마들을, 밥벌이나 본드 흡입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는 소년들을, 중1 때부터 눈 화장하고 밤거리를 방황하는 소녀들을. 도시의 빌딩 숲에 감춰져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의 감각을 날것으로 전한다.



 서울대 김홍중(사회학) 교수는 두 세계를 오갔던 조 교수의 연구를 “소명으로서의 분열”이라고 부른다. “현장은 사회학자의 양심이며 아틀리에다…사회학은 리얼리티와 이렇게 껴안고 부대끼고 함께 고통스러워하면서 생산되는 지식이 아니던가.”(학술지 ‘문화와 사회’)



 그들의 삶을 통해 당신도 오래전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던,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사계)를 따라 부르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계층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었던 그때, 그 분열의 감수성 말이다. 보수·진보의 깃발이 구심력을 잃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의 희망은 그렇게 작은 분열들에서 싹틀지 모른다. 이것이 쿨(cool)한 성공 스토리가 더 듣고 싶었을 당신에게 내가 말을 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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