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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17> 천하 절경 구이린(桂林)

중앙일보 2012.05.30 00:00 경제 13면 지면보기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산 봉우리 세 개마다 두 개의 동굴이 있고, 이를 휘감아 흐르는 한 줄기 강(三山兩洞一條江)’. ‘산수갑천하(山水甲天下)’는 천하 절경 구이린(桂林)에 딱 맞는 표현이다. 구이린의 산은 푸르고(山靑), 물은 빼어나며(水秀), 동굴은 기이하고(洞奇), 암석은 아름답다(石美). 리강을 따라가는 뱃길 좌우로는 백리화랑(百里畵廊)이 펼쳐진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구이린으로 떠나 보자.


“물은 푸른 비단, 산은 벽옥 비녀 …” 그림같은 풍광에 시 한수 저절로



12개 봉우리 배경으로 펼치는 장이머우 ‘인상 류산제’



1.654㎢ 넓이의 리강을 무대 삼고 12개의 산봉우리를 배경 삼아 600여 명의 현지 농민 배우가 펼치는 산수실경(山水實景) 공연. 5년5개월의 준비 끝에 2004년 3월 20일 구이린에서 첫선을 보인 ‘인상·류산제(印象·劉三姐, 류씨 집안 셋째 딸)’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광시(廣西) 희극가협회 부주석인 메이솨이위안(梅帥元·55)이 아이디어를 내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총연출한 장이머우(張藝謀·61) 감독과 손잡고 만들었다. 좡(壯)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바탕이다. 중국 서남(西南)지방 소수민족의 노래를 주고받으며 겨루는 풍속도 극의 기본 틀이다. 노래의 달인인 류씨네 셋째 딸은 꾀꼬리의 환생처럼 ‘노래하는 신선(歌仙)’으로 불렸다. 그녀가 영민한 동네 총각과 손잡고 부족장의 폐륜 아들을 물리치고 사랑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공연은 서막을 시작으로 장이머우 특유의 색채 마술이 홍색, 녹색, 금색, 남색, 은색의 순서로 70여 분간 펼쳐진다. 4000개의 조명 세트가 5~10㎞ 떨어진 거리의 산에서 객석을 향해 빛을 뿜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공연이 첫선을 보인 뒤 “낮에는 구이린의 자연을 보고, 밤에는 ‘인상·류산제’ 공연으로 구이린의 영혼을 본다”는 말이 회자된다.



리강을 무대로 매일밤 좡족의 전설이 펼쳐지는 ‘인상·류산제(印象·劉三姐)’ 공연장.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구이린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호평 속에 흥행에 큰 성공을 거뒀다. [사진 인상류산제 공식사이트]


  구이린에서 시작된 장이머우의 인상 시리즈는 리장(麗江), 시후(西湖), 하이난다오(海南島), 우이산(武夷山) 등 중국의 명승지를 따라 흥행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실경산수 공연이란 장르를 창안한 메이솨이위안은 장이머우와 별도로 소림사(小林寺), 화청지(華淸池), 송(宋)나라의 수도 카이펑(開封), 태산(泰山) 등지에서 초대형 실경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인상·류산제’의 흥행 성적은 놀랍다. 강변에 마련된 3000여 객석은 3만5000원부터 13만원까지 가격대를 넓혀 선택의 폭을 넓혔다. 2009년 한 해 동안 497회 공연을 펼쳐 1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수입 총액은 482억여원. 2004년 구이린 호텔의 총 침대 개수는 6000개가 채 못 됐다. 인상 공연이 시작된 지 2년 만에 1만2000개로 갑절이 늘었다. ‘인상·류산제’ 공연이 구이린에 관광객 ‘폭탄’을 선사한 셈이다.



구이린 시인 원매(袁枚) ‘유계림제산기(游桂林諸山記)’



“리강을 거슬러 흥안에 이르니 물이 아주 맑구나(江到興安水最淸), 푸른 산은 무리지어 물 가운데 솟아 있네(靑山簇簇水中生). 분명 푸른 산의 정상을 보았는데(分明看見靑山頂), 배가 푸른 산 봉우리를 지나가네(船在靑山頂上行).”



  청(淸) 나라 원매(袁枚, 1717~1797)가 노래한 구이린의 모습이다. 원매는 구이린의 대표 시인이다. ‘유계림제산기(游桂林諸山記)’를 지어 250여 년 전 구이린의 모습을 눈에 보일 듯이 묘사해 놓았다.



  일반적으로 산은 도시에서 멀다. 그러나 구이린의 산들은 도시와 가깝게 붙어 있다. 바위산들의 특이함은 나도 일찍이 들은 바 있다. 한유(韓愈)는 “물은 푸른 비단으로 만든 띠 같고(水作靑羅帶), 산은 벽옥으로 만든 비녀 같네(山如碧玉簪)”라고 했고, 유종원(柳宗元)은 “구이린에는 영산이 많은데 땅 위로 우뚝 솟아 사방에 숲처럼 서 있다”라고 했으며, 황정견(黃庭堅)은 “구이린의 산들은 안탕산처럼 도시와 이어져 있고, 평지에 푸른 옥이 문득 솟아 있는 것 같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태수의 관아에서 객으로 머물던 나는 밥을 먹은 후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길에 올랐다.



  첫 번째 목적지는 유명한 독수봉(獨秀峰)이었다. 이 봉우리는 원반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넓은 동서는 단정하면서도 웅장하고, 좁은 남북은 험준하면서도 절경이라 평소 “남쪽 하늘을 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산의 동쪽 기슭에는 남조 송나라 안연원(顔延元)이 책을 읽었다는 바위가 있는데 구이린에서는 가장 오랜 명승지다. 그는 “홀로 뛰어나지 않다면 성 밖에 우뚝 서리라”라는 말을 했는데, 독수봉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돌계단을 300여 개쯤 올라가자 산 정상이었다. 그곳에서 구이린성을 바라보니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름답게 떠다니는 모습이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중략)



  다음 날에는 남훈정(南薰亭)을 구경했다. 이 일대의 산세는 독수봉과 달리 비교적 평탄했다.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멀리 바라보니 안개가 마구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 그늘 밑에 자리한 정자에 앉자 가슴속에서 맑은 기운이 솟구쳐 나오는 것 같아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 날에는 목룡동(木龍洞)으로 갔다. 목룡동은 남계산(南溪山)에 있는데, 동쪽으로 리강과 닿은 남계산은 산봉우리 두 개가 천 척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비가 온 뒤 하늘이 갤 때면 운무가 걷히고 점차 드러나는 햇살이 순백의 바위를 비추면 오색찬란한 빛깔을 반사하기 때문에 예부터 ‘남계신제(南溪新霽)’라는 이름이 있었다. 산기슭과 산 중턱의 많은 암굴 가운데 백룡동은 북쪽 절벽에 있었다. 이 동굴은 좁고 어둡기 때문에 불 없이는 전혀 경관을 볼 수 없다. 동굴 벽에는 당대 시인 이발(李渤)의 ‘유별남계(留別南溪)’라는 시가 새겨 있었다. 아래로 드리운 종유석들은 마치 연밥 열매의 바깥 뿌리가 반쯤 익은 것 같기도 하고, 밀폐된 그릇 안의 변질된 고기처럼 한 조각씩 떼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람에게 심장과 배와 신장과 창자 등의 기관이 있는 것처럼 산도 반드시 그런 것 같았다. 다음에는 유선(劉仙)이 약초를 캐고 연단을 했다고 전해지는 유선암(劉仙巖)으로 갔다. 동굴 안의 돌기둥에는 수많은 도사가 썼던 전서가 새겨져 있었다. 누각에 올라 투계산을 바라보니 그 모습은 마치 수탉이 날개를 펼친 듯 웅대했다.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산 중턱의 텅 빈 동굴은 둥근 보름달처럼 보였다. (하략)



우아하고, 청량하고, 오묘한 … 계절따라 천변만화



리강은 좌우로 서있는 산봉우리들이 백리에 걸쳐 천변만화의 그림과 같이 펼쳐진다 하여 백리화랑(百里畵廊)으로 불린다. [중앙포토]


구이린과 리강은 날씨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먼저 맑고 바람 부는 날의 청경(晴景)이다. 포근한 바람결을 따라 흐르는 뭉게구름과 바람에 하늘거리는 나무와 꽃들은 마치 미녀의 몸을 감싼 옷자락같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둘째로 바람이 자고 물결도 잔잔한 날의 정경(靜景)이다. 강변의 사시사철 푸른 봉황죽(鳳凰竹)은 소녀의 치맛자락과 같이 우아하고 매혹적이다. 산봉우리의 드리운 그림자는 몽롱하면서도 또렷하게 다가온다. 달 밝은 밤이면 무리 지은 봉우리들은 방금 목욕한 듯하고, 강 위의 물결은 하얀 명주 같아 신선의 고향에 온 듯하다.



  셋째로 비 내리는 우경(雨景)이다. 안개비가 내리면 리강 사이로 구름이 피어오른다. 산봉우리와 세상이 숨은 듯 드러낸 듯, 끊어진 듯 이어진 듯 펼쳐진다. 빗속의 풍경은 나그네를 공허함이 메아리치는 오묘함 속으로 안내한다.



 끝으로 안개 자욱한 무경(霧景)이다. 이른 새벽 리강은 마치 꿈속인 듯 짙고도 옅은 안개가 산봉우리를 휘어감는다. 구천(九天)에 오른 듯 손을 뻗으면 구름의 그림자가 잡힐 듯하다.



국민혁명 참여한 이쭝런, 최후의 유학자 량수밍의 고향



“구이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신선이 되기를 바라지 않노라(願作桂林人, 不願作神仙).” 신중국의 상하이 초대 시장과 외교장관을 역임한 천이(陳毅) 장군의 말이다.



  해발고도 150m 내외의 석회암 지형인 구이린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남만(南蠻)의 땅이었다. 서남의 날씨는 작물 재배에 적합하지만 땅은 넓고 인구는 적다. 일년 중 몇 개월만 농사지어도 생활에 큰 문제가 없다. 주위가 고산지대라 상업으로 돈 모으기는 어렵다. 생존은 쉽지만 치부는 어려웠다. 가난뱅이가 없는 대신, 큰 부자 역시 없었다. 이 때문에 서남 사람들은 순박하고 검약하며 온화하고 한가한 기질을 가졌다. 사계절의 구분이 없어 계절에 쫓기며 일할 필요가 없다. 안분지족하며 낙천적인 서남 사람이지만 구이린만큼은 인재의 산실로 와호장룡의 땅이었다.



  광시 군벌 리쭝런(李宗仁, 1890~1969)이 구이린 사람이다. 군사학교를 졸업한 리쭝런은 쑨원(孫文)에게 동조해 국민혁명에 참여했다. 국공합작 당시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보로딘이 그에게 장제스(蔣介石)를 대신해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대신 장제스가 공산당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국민당이 전국을 통일한 뒤 장제스와 반목했다. 항일전쟁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승전 후 1948년 국민대회 부총통선거에 출마해 장제스가 지지하던 쑨원의 큰아들 쑨커(孫科)를 무찌르고 부총통에 당선됐다. 49년 1월 장제스가 총통직에서 사임하자 총통직무대행을 맡아 공산당을 상대했다. 대륙을 빼앗긴 후 미국에 망명했다가 65년 베이징으로 귀국해 마오쩌둥에게 ‘애국자’란 칭호를 받았다. 사후에는 바바오산(八寶山)에 안치됐다.



 최후의 유학자로 불리는 량수밍(梁漱溟, 1893~1988)의 고향도 구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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