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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은 간 데 없고 ‘올드 상하이’ 향수만 넘치네

중앙일보 2012.05.21 00:21


▲중국 상하이 인민광장의 모습. 1989년 천안문(天安門) 광장의 민주화 시위가 무력진압된 후 이곳엔 나무가 심어졌고 분수대·대극장·박물관·주차장 등으로 분할됐다. 인민광장을 가르는 인민대도가 가장 넓은 공지라고 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④ 상하이 인민광장~루쉰공원



상하이 인민광장을 만리장정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이곳이 시안(西安)까지 가는 312번 국도의 시발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민광장의 변천은 중국 근·현대사의 굴곡 그 자체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840년 난징조약을 통해 상하이를 조차(租借)하면서 멀리까지 와서 고생(?)하는 자국민들의 오락을 위해 경마장을 건설했다. 1930년대에는 분위기 살벌한 군대 막사로 바뀌는데 서울 용산처럼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들이 주둔했다. 45년에는 항일전쟁에서 중국을 도운 미군들이 상하이에 진주, 이곳에 클럽을 만들면서 다시 노는 곳으로 돌아갔다. 49년 건국 후 비로소 이름이 생겨 인민광장으로 명명됐다.



▲1930년대를 재현한 펑칭제(風情街) 입구.





▲인민광장 지하 펑칭제에 있는 미용실. 30년대의 옛 정취와 현대의 광고물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데가 인민광장인데 왜 물어?” 인민광장 지하철역에서 빠져 나와 드넓은 공지를 찾는 내게 경비원 아저씨는 “녹화사업을 해서 숲이 들어섰고 분수대와 대극장·박물관·지하상가·주차장 등으로 나뉘어 개발됐다”며 “더 이상 천안문(天安門) 광장같이 넓은 곳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만약 인민광장의 변천을 20대 젊은이로 표현한다면, 19세기 말 젊은이들은 경마장 표를 팔았을 테고 30년대엔 일본군 헌병의 군화를 닦거나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45년엔 미군 클럽에서 웨이터로 술병을 날랐다고 하면 49년엔 사회주의 혁명의 열정으로 이 광장이 진동했을 것이다 이때가 아마 유일하게 인민의 광장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원하든 원치 않든, 인민들은 자주 인민광장에 불려나가 대규모 정치 집회에 참여해야 했다. 60년대 말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조반파(造反派)’의 젊은이들이 상하이 시장과 당 서기를 군중 앞으로 끌어내 공개비판했으며 무장 민병대원들은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며 의기양양하게 행진했다. 문혁의 깊은 골을 통과한 인민광장은 한동안 용도가 불분명한 채 방치되다 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처럼 상하이와 인근 대학생들이 이곳에 모이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상하이를 대표하던 잡지 ‘양우(良友)’. 1937년 7월 표지모델로 등장한 정핑루. 영화 ‘색,계’의 모델이다.



격렬한 정치 토론이 오갔고 다시 인민의 품으로 돌아올 것 같았던 인민광장은, 그러나 시위가 무력진압되면서 광장으로서의 운도 다했다. 각종 문화·편의시설로 쪼개져 군중이 모일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인민의 힘으로 정권을 쟁취한 중국 정부가 이제는 인민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대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인민들은 정치참여를 강요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시대인가.



지금은 인민광장에서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한다. 상하이에 도착한 첫날, 밤 9시쯤 도착한 인민광장의 분수대에는 밀어를 나누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인민은 없고 개인만이 있다. 그리고 광장 지하로 들어가자 1930년대의 풍물을 복원한 펑칭제(風情街)가 긴 통로를 따라 이어졌고 소비자들로 붐볐다.



중국의 미래라고 불리는 상하이는 30년대를 그리워한다.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는 자유·개방·선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서방의 새로운 문화와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개방적인 기운이 넘쳐흘렀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둘째 날 자전거를 타고 상하이 우쑹(吳淞) 강변 광복로에 있는 ‘양우기념관’에 들렀을 때 기념관의 편집자인 친링(秦<5CAD>·진령)은 이렇게 말했다. ‘양우(良友)’는 1926년에 창간돼 45년까지 20년 동안 상하이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잡지였다. 당시 10만 부씩 팔려나갔다. 이 기념관은 ‘양우’를 보존하고 그 정신을 퍼뜨리기 위해 옛 공장 창고를 개조해 만든 아담하고 정취 있는 건물이다.



내 머릿속에서 1930년의 상하이는 중국의 무력함과 서구 저급 문화의 침투, 아편과 조직범죄 같은 혼란스러운 이미지로 떠오르는데 상하이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기념관을 돌다가 벽에 붙여놓은 역대 표지 중에서 지적이면서도 세련된 여성의 사진을 발견했다. 영화 ‘색, 계’에서 탕웨이가 역을 맡은 정핑루(鄭<860B>如·정빈여)였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그 여성의 실물사진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정핑루와 비교할 때 탕웨이가 더 1930년대의 상하이 여성처럼 생겼다고 할 만큼 그의 외모는 현대적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영화 ‘색, 계’는 장아이링(張愛玲·장애령)이 쓴 소설을 각색한 것이고 소설 ‘색, 계’는 정핑루의 짧은 생애를 소재로 한 것인데 여기서 극적인 ‘왜곡’이 일어난다. 정핑루는 37년 12월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 친일정부의 정보기관 책임자 딩모춘(丁默邨·정묵촌)을 암살하려다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거사에 실패하기 5개월 전인 7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양우’의 표지에 등장한다. 대만의 중문학자 류이링(劉怡伶·유이령) 박사는 ‘전기문학’ 2007년 11월호에 발표한 글에서 “정핑루가 ‘양우’를 활용해 지명도를 높인 뒤 미인계를 쓰려고 ‘양우’에 사진을 보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에는 독자들이 ‘양우’에 사진을 보내는 관행이 있었다는데 정핑루는 그만큼 용모에 자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국민당 정부의 검사였던 정웨위안(鄭越原·정월원)과 일본인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핑루는 대학 시절 국민당 정보국의 첩보원으로 가입했고 첩보원 신분을 감추고 ‘양우’에 사진을 보낸 것이다. 당시에는 ‘정 여사’라고만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젊은 여성도 여사라고 부른다. 류 박사는 “정핑루의 일본 혼혈 혈통과 일어 구사력은 왕징웨이 정권에 접근하는 데 유리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썼다.



각색할 필요 없이 그의 인생이 영화다. 이 드라마틱한 여성을 거칠게 말해 친일분자와 바람난 여자로 묘사했으니 장아이링이 작품을 쓰고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렸다가 79년에야 발표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장아이링 본인도 왕징웨이 정부의 홍보책임자 후란청(胡蘭成·호란성)과 결혼한 이력이 있다고 하니….



공개적으론 반일 정서가 강한 중국에서 민감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러나 2007년 11월 1일 상하이에서 개봉하는 날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표 한 장 값이 150위안(약 2만6000원)이었고, 시사회에 온 사진기자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몸싸움을 벌여 공안이 출동했다. 성공 요인에는 리안(李安) 감독과 량차오웨이(梁朝偉·양조위), 왕리훙(王力宏·왕력굉) 같은 스타들이 참여한 점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다른 대도시에서도 흥행에 성공했지만 내가 굳이 읽어내고자 하는 점은 올드 상하이에 대한 향수다.

1930년대 중국은 근·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그때 유일하게 환락에 취해 흥청망청했던 곳이 상하이였다. ‘색, 계’의 흥행 성공이나 30년대 풍물거리의 성행은 상하이가 민족·혁명 같은 담론보다는 개인의 행복, 그리고 본능의 추구가 더 중요한 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담이지만 중국에서는 이 영화의 야한 대목은 삭제된 채 개봉됐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북상해 다음으로 간 곳은 루쉰(魯迅)공원 근처, 옛 프랑스 조계의 루쉰의 옛집이다. 정확히 말해서는 루쉰 옛집의 앞집이다. 1916년에 지어진 앞집에는 사전에 알게 된 젊은 예비부부가 산다. 장자밍(張佳銘·장가명)과 펑사오이(馮少儀·풍소의). 그들은 상하이에서 대학을 갓 졸업했고 상하이를 떠나 광둥으로 귀향할 예정이다. 루쉰 선생은 앞집에서 36년 임종할 때까지 중국을 비판하고 중국인을 일깨우는 글을 썼는데 지금의 상하이는 30년대를 그리워하는 역설적인 상황. 만약 루쉰 선생이 앞집에 살아 있다면 뭐라고 할까. 내가 이 예비부부에게 던진 질문이다.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식품을 팔고, 뇌물과 특혜가 횡행하며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재난을 당해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에 대해 통렬히 비판할 것이다.” 장자밍의 말이다. 그러면서 “사회의 투명도를 높여 정부 관리들이 하는 일들을 다 알 수 있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견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정치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는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마 언론의 자유가 조금씩 늘어나고 인터넷에서 여론이 형성되면 사회의 투명도가 높아지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의 중앙TV(CC-TV)를 보면 원자바오 총리와의 대화 같은 코너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검열은 아직도 강력하다.



이들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오는 6월 이집트와 터키로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루쉰 선생이 설혹 사회 문제에 대해 그런 비판을 하면서도 중국이 이전보다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1930년대의 상하이는 국가권력이 가장 약했을 때였다. 상하이인들은 국가 간섭 없이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하는 꿈에 젖어 있다. ‘상하이를 따라서 중국 전체가 현대화의 길로 나아가자(依<9760>上海, 帶動全國)’.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다. 과거에는 상하이가 가장 행복할 때 중국은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지금은 어떨까. 이번 여행에서 확인해보고 싶은 점이다. 페달을 힘차게 밟아 다음 목적지 쑤저우(蘇州)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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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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