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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우울증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중앙일보 2012.05.21 00:00 종합 33면 지면보기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두 가족이 모이면 그중에 한 명 이상은 우울증을 앓는 시대가 됐다. 2011년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평생 한 번 이상 우울증 등 기분장애를 앓는 국민은 7.5%로 2006년의 6.2%보다 훨씬 더 증가했고, 최근 1년간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18~64세 성인이 100만 명이 넘는다.



 우울증이 이렇게 흔해지는데, 어떤 분들은 등 따습고 배부르니까 별소리를 다한다고 타박한다. 헐벗고 굶주린 시절을 맨주먹으로 헤쳐 왔는데, 이제 먹고살 만하니까 한가한 소리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헐벗고 굶주린 후진국에서는 우울증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민소득이 낮고 평균수명도 짧은 나라에서는 오늘 하루를 살아남는 것이 절박하다.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여유도 없다. 남이 나를 죽일까 봐 걱정이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울증은 바로 먹고살 만한 나라, 등 따습고 배부른 나라에서 많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울증은 근대화된 자아(自我)가 형성된 뒤에 급증한다. 공동체는 큰 의미가 없다. 내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가족 간에도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이 다르다. 형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 때문에 내 학비를 양보할 수는 없다. 남편이 성공할수록 아내는 더 외롭고 허전해질 수 있다. 특히 가까운 타인과 격차가 클 때 나는 더 우울해진다.



 게다가 한국은 최단 기간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됐다. 그 과정에서 환경이 너무 빨리 변했다.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배워야 할 지식은 수십 배 늘어났고,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아졌다. 타고난 유전자는 거의 달라지지 않는데, 단시간 내에 그 모든 변화를 다 따라가려니 우리의 뇌에 무리가 왔다. 이것이 한국에 우울증이 급증하는 원인이다.



 아무리 우울증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도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울증은 빠른 경제성장의 대가다. 현실로 인정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 우울증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든지 걸릴 수 있는 병이다.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걸릴 수 있는 병이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좋은 글을 읽어도 재발할 수 있는 병이다. 내 친구, 내 부모, 내 아들·딸도 걸릴 수 있는 흔한 병이다. 그런데 거기에 편견과 낙인을 찍어서야 되겠는가. 민간보험에서 가입을 차별하는 관행은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둘째로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면 정신건강 전문가에게 가야 한다. 그런데 통계를 보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제대로 치료받은 우울증 환자는 8.1%에 불과하다.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않는 대가는 참담하다. 어느 젊은이가 자살하려고 방에서 뛰어내렸는데 운 좋게 다리만 부러지고 살아났다. 응급조치를 취한 뒤 의사는 정신과 진료를 꼭 받으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그 보호자는 다리뼈만 치료하고 그냥 집으로 데려갔다. 결국 그 젊은이는 다른 방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셋째로 정신건강 분야의 사업 예산을 획기적으로 증액해야 한다. 정신과의 건강보험 의료급여비는 대부분 입원 환자에게 쓰이고 있으며, 정부의 사업 예산은 400억원에 불과하다. 조기에 치료가 안 되니까 질환이 만성화되고 전체 의료비도 증가된다.



 국민의 건강한 정신은 국가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국민 다수가 우울증에 빠진 상태에서 문화와 창조가 꽃피울 수는 없다. 감성을 키우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음이 건강해야 가능한 일이다. 돈만 나눠주는 복지보다는 높은 생산성으로 연계될 수 있는 마음의 복지가 더 필요하다.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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