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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도 "그 정도야?" 놀란 박영준의 4년 추적

중앙일보 2012.05.12 00:20 종합 16면 지면보기
파이시티 인허가 청탁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7일 구속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이상득 의원 보좌관에서 출발해 이명박 정권에서 ‘왕차관’으로 불렸던 그가 지금은 권력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뉴시스]
역사는 많은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대부분 스쳐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명박 시대에 박·영·준, 이 석 자는 각인될 듯하다.


창업공신 이재오·정두언 따돌리고 권력 사유화
‘MB의 뜻’ 앞세워 금융계 인사까지 좌지우지

 그는 정권 태동기엔 그저 그런 인물 중 하나로 보였다. 그러나 권력이 출범하자마자 ‘실세’로 부상했다. 권력의 팽창기엔 ‘왕비서관’ ‘왕차관’으로 불렸다. 그렇게 4년여를 정점에서 머물렀다.



 그러곤 추락했다. 그는 올 1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역대 선거에서 조직을 했던 사람이 100% 구속됐다. 나는 감옥 가기 싫었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는 7일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구속 수감됐다.



 그는 원래 ‘대우맨’이었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건 1994년이다. 당시 민자당(새누리당의 전신)의 정책조정1실장을 맡고 있던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이 됐다. 이 의원이 김우중 회장에게 “일 잘하는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요청해 이뤄진 일이라고 한다. 그는 이후 11년간 계속 ‘이상득 의원 보좌관’이었다. 그사이 이 의원이 정책위의장·사무총장을 지내면서 그 또한 비중 있는 일을 맡았다. 2000년대 초 이 의원이 사무총장을 하던 시절 총장 방으로 통하는 요지엔 장다사로 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문가 쪽 자리엔 그가 앉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론 보좌관 신분이었다.



 2002년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면서 그는 이 대통령을 도왔다. 그러다 2005년엔 아예 서울시 정무담당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1년 만에 이상득 의원 보좌관 신분을 벗어난 것이다.



 그는 2006년 하반기 꾸려진 대선 캠프에서 조직을 담당했다. 김대식 동서대 교수와 함께 243개 지역구를 여섯 번 돌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뿌리는 명함 값 때문에 당에서 항의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2007년 10월 결성된 선진국민연대였다. 회원 수만 463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대선에서 낙승한 건 선진국민연대의 공이 컸다”고 평가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명박계 내부에선 많은 이가 “사무국만 있었을 뿐인데 선진국민연대의 역할이 과대 포장돼 있다”고 여긴다. 이 대목은 이후 두고두고 갈등 요인이 됐다. 논공행상(論功行賞) 과정에서 선진국민연대가 독식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의 ‘권력사유화’ 발언이나 영포(영일·포항) 라인, 선진국민연대의 국정 전횡 논란도 그 연장선상에서 돌출했다는 게 정설이다.



2008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 기자회견장으로 가던 박영준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이 류우익(오른쪽) 대통령실장 내정자와 김인종 경호처장 내정자(가운데)를 만나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2007년 12월 19일의 일이다. 선거 날이었지만 이미 압승이 예고된 터라 캠프의 시선은 정권 인수에 맞춰져 있었다. 그날 이 대통령과 정두언 의원, 그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박영준=선진국민연대가 고생했으니 인수위에 많이 넣어달라.



 ▶정두언=뭘 그러느냐. 당신이 직접 와서 일해라.



 정 의원은 이후 이 대통령에게 “박영준을 데려다 일해야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가 자신과 이상득 의원 사이의 채널이 돼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대통령은 다음날 새벽 박영준을 불렀다. 그러곤 “당선자 비서실을 총괄하라. 정권 인수위 인선 작업을 마무리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는 이후 기자들에게 혼자 특명을 받았다는 취지로 알렸다. 이 대통령과 가까운 한 의원은 “언론에 그가 큰일 하는 듯 나더라. 실제론 그게 아니었는데…”라고 말했다.



 그 직후 정두언 의원이 이 대통령에게 불려가 한 시간여 ‘깨진’ 일이 벌어졌다. 정 의원이 국세청에서 만든 ‘이 대통령 일가 파일’을 구하려 한다는 소문이 돈 뒤였다. 인수위에 정두언 사람이 많다는 얘기까지 겹쳤다.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이상득·이재오·정두언의 3대 축에서 정두언 의원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 무렵 정 의원이 겪었다는 일이다. 정 의원이 당선자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직원들이 뭔가를 쓰다가 감추었다고 한다. 정 의원이 추궁하자 직원들이 머뭇머뭇하다가 “청와대에 들어가려면 신원진술서를 써야 한다고 해서 쓰는 중”이라고 답했다. 정 의원이 재차 “누구 마음대로 뽑느냐”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박영준”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이 박영준에게 인선 내용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가 “못 보여준다”고 맞섰다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도 그 즈음이다.



2010년 8월 청와대에서 박영준 지경부 2차관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영준은 정권 출범 전부터 인사 실무를 도맡았다. 조각(組閣)의 산실로 불렸던 롯데호텔 31층에는 류우익 초대 대통령실장과 임태희 당시 당선인 비서실장, 그리고 박영준이 있었다. 그는 그사이 기자들과 접촉을 끊었다. 대신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이 업보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용서바랍니다’란 문자를 남겼다.



 인사 작업이 마무리된 2월 초 그가 인수위 기자실을 찾았다. 자신이 말한 ‘업보’를 풀겠다는 취지였다. 그는 “한 달간 무려 5000여 명의 인사 파일을 들여다봐야 했다. 사람들 이름만 들어도 신물이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보좌관 11년 경력의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규모의 기자들과 인터뷰한 건 그로선 처음이었다. 정치적으로 성장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는 2008년에 대구 중-남에 출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곁에서 도와달라”고 만류하자 출마를 포기하고 청와대에 남기로 했다. 그는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이 됐다. 회의 운영과 정보, 내부 감찰 등 3개 팀을 이끌었다. 청와대 수석실에서 생산되는 모든 보고서와 회의 자료를 사전 스크린하고 국가정보원·경찰 등에서 생산되는 정보를 취합하는 게 일이었다. 아침에 올라온 정보보고를 모두 읽기 벅찰 정도로 정보량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인사 라인은 김명식 인사비서관과 윤한홍 행정관(현 행정자치비서관)이었다. 모두 그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인사와 정무·감찰이란 청와대의 핵심 기능을 박영준이 좌지우지한 것이다.



 자연히 그와 가까운 그룹들이 청와대와 정부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영포 라인과 ‘하이 서울’(서울시 출신) 라인, 그리고 선진국민연대 출신들이다. 여권에선 “박영준이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청와대와 정부를 장악할 수밖에 없었고 최근까지도 힘을 발휘해온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그는 정권 초반부터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2008년 3월 23일 총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남경필·정두언 의원 등 55인이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했다. ‘형님 공천’ ‘형님 인사’를 이유로 들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부실한 검증과 폐쇄적인 인사 건의로 인사 파동을 초래했던 청와대 관계자에게 책임을 묻고 사퇴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참여한 김용태 의원은 “청와대 관계자라 함은 당시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박영준 비서관을 가리킨 것”이라고 전했다.



 총선 직후 그가 속한 진영이 반격했다. 이 대통령이 “낙선자들은 총선 이후 최소한 6개월 동안은 청와대와 정부·공기업에 기용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공개하면서다. 박영준과 가까운 인사들은 “낙천자들과 달리 낙선자들은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댔다. 이 때문에 이재오·박형준 등 낙선 인사들은 한동안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이재오계와 정두언 의원 등 소장파에선 “박영준이 이상한 조항을 만들어 권력을 독점하려 든다”고 펄펄 뛰었다.



 2008년 5월 이재오 의원은 공천 파동의 책임을 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현 정부를 탄생시킨 세 축(이상득·이재오·정두언) 중 정두언 의원에 이어 이재오 의원마저 흔들린 거다. 세 축 가운데는 이상득 의원만 남았다. 한마디로 독주 체제였다.



 그러나 햇볕이 강하면 그림자도 큰 법이다. 그해 6월 초 정두언 의원이 “대통령 주변 일부 인사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 박영준 비서관이 제일 문제다. 보좌관 한 명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모든 중요한 인사가 다 그의 손에서 이뤄진다고 보면 된다”고 공개적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언론에서 ‘공신(功臣)의 난’으로 명명한 사건이었다.



 청와대가 급히 수습에 나섰다. 그는 눈물 속에 청와대를 떠났다. 청와대에선 “류우익 대신 박영준이 떠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러나 박영준의 사람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의 후임은 분신 격이랄 수 있는 사람(정인철 전 비서관)이었다. 이 대통령도 당시 안경률 의원과 만나 “일부 의원의 묻지마식 인신공격 행위와 발언들이 걱정스럽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는 7개월여 동안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그사이 전국에 흩어진 선진국민연대 사람들을 두루 만났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러나 “여의도 사무실에서 여당 중진들을 면접해 공기업 사장으로 보낼지를 결정한다”거나 “정부 최고위급이 같이 일하자며 연임시켜달라고 로비했다”는 유(類)의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가 포스코 정준양 회장의 선임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그중 하나다. 그가 회장 후보였던 정 회장뿐 아니라 윤석만 포스코 상임고문과 각각 만나 ‘면접’을 봤다는 거다. 박태준 명예회장 부부와도 만나 박 명예회장의 의중도 타진했다고 한다. 정 회장에게 회장 선임 사실을 통보한 사람도 ‘박영준’이었다고 한다.



 박영준은 이런 논란에 대해 사석에서 “인사는 다 대통령의 뜻”이란 취지로 해명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일화도 있다. 금융계가 ‘낙하산 인사’로 시끄럽자 이명박계 원로급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앞뒤 말을 맞춰본 일이 있었다. 청와대 행정관이 “이 대통령의 뜻이니 이 사람을 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데 실제 대통령의 뜻이 맞느냐 여부를 두고서다. 결론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 행정관은 박영준 사람으로 분류되던 인사였다.



 2009년 1월 그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째 임명장을 받았다.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이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차관과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도 함께 기용됐다. 이른바 ‘차관 정치’ 시대였다. 실세들이 차관으로 나서 국정운영을 책임진다는 게 요체였다. 특히 그는 ‘왕차관’으로 불렸다. 한때 15개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책임질 정도로 막강했다. 정부의 감찰 기능까지 움켜쥐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후 논란이 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그 일이다.



박영준이 일요일 집무실에서 대선 조직이었던 선진국민연대 사람들을 불러놓곤 “대통령이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내가 대신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그가 주재하는 회의에 청와대 비서관 대신 한 등급 아래인 행정관을 보낸 걸 두고 박영준이 노발대발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청와대 비서관은 회의 참석이 어려워도 일단 가서 “이러저러해서 행정관을 보낸다”고 말하고 나와야 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한 이는 “박영준은 권력이 있을 때 그걸 누려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09년 4월 재·보선에서 여당은 혹독한 민심을 맛보았다. 쇄신론이 바닥에서부터 끓어올라 6월 초 정두언·차명진 등 이명박 직계 7인이 “현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 이반은 한나라당·정부·대통령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심판”이라고 규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만사형통(萬事兄通·모든 일은 형님을 통한다)’을 문제 삼은 거다. 2차 ‘공신의 난’이었다.



 당시 정태근 의원이 이 대통령에게 직접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최근 시중에서 대통령이 두 명, 총리가 두 명이라고 합니다.” 또 한 명의 대통령은 이상득, 총리는 박영준을 가리킨 거였다. 이 대통령은 “그 정도야?”라고 되물으며 “함부로 못하게 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이상득 의원은 정치 2선 후퇴를 선언했다. 당일 아침 이 의원은 쇄신파 정두언, 이명박계 소장파 김영우·조해진 의원 등을 만나 ‘진의’를 전했다. 그 자리에서 정 의원은 “박영준을 대한민국 사람이 다 SD(이상득 의원 지칭) 사람이라고 한다.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는데 왜 그냥 두느냐. 오늘 2선 후퇴한다고 국민이 납득하겠느냐”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득 의원은 물러나도 그는 자리를 지켰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그 무렵의 박영준에 대해 “대통령도 그가 오버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큼 대통령의 뜻을 읽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없어서 쓰는 것”이라고 했다.



 박영준은 그해 9월 부임한 정운찬 총리와 갈등을 일으켰다. 정 총리가 총리로서 실권을 발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2010년 2월 김유환 총리실 정무실장의 임명 과정이 대표적이다. “정 총리가 국가정보원 경기도지부장 출신인 김 실장을 기용하려고 하는데 박 차장과 청와대 선진국민연대 라인이 반대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정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총리가 정무실장조차 마음대로 기용 못하는 건 곤란하다”는 뜻을 전달한 뒤에야 ‘OK’ 사인이 났다고 한다. 정 총리는 그 후에도 이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인사권의 일부라도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왕차관’을 경질하겠다는 의사였다.



 그즈음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논란이 불거졌고 영포목우회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선진국민연대의 국정 전횡 논란도 제기됐다. 박영준이 의혹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는 그러나 “나는 칠곡 출신이어서 영포목우회는 모른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창설 때 야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며 부인했다.



 그래도 ‘왕차관’이 사퇴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의혹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 대통령에게 짐이 될 수도 있으니 이번 인선에서 배제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러나 그와 가깝거나 그의 상황을 잘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건재를 믿었다. 역시 ‘왕차관’은 물러나지 않았다.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그해 8월 지식경제부 차관이 됐다. 청와대에선 “부처를 틀어쥐고 모든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권력형 요직(국무차장)에서 정치색이 엷은 정책형 차관직으로 이동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영준과 가까운 김대식 동서대 교수는 당시 전당대회에 출마, 정두언 의원에게 “박영준도 옛날의 (작았던) 박영준이 아닙니다. 실체를, 현실을 인정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상득 의원과 가까운 한 인사가 “이상득 의원보다 그가 더 센 것 같다”고 토로한 것도 그때다.



 이 대통령은 그에게 새 임명장을 주면서 “내가 임명한 사람 중 왕씨는 없는데…. 이른바 실세 차관을 그렇게 부르던가 보던데 나에게 그런 실세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실세”란 말도 했다. 세간의 ‘왕차관’이란 주장을 ‘뼈 있는 농담’으로 반박한 거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실제 박 차관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무자나 일꾼으로 생각했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주변에서 건들지’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미스터 아프리카’로 불릴 정도로 에너지와 자원 외교에 집중했다. 부임한 지 두 달 뒤엔 중동·아프리카에 자원외교를 한다며 전세기를 띄웠다. 여기에 포스코·SK에너지·코오롱·삼성물산 등 28개 기관의 수뇌부 57명의 수장이 동행했다. 국가수반급 외교행렬과 비슷했다. 그는 주변에 “후진국일수록 한국에서 ‘실세’가 왔다며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야당에선 “같은 기간 장관은 혈혈단신으로 터키를 다녀왔는데, 이제 왕차관을 소통령으로 승진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김영환 국회 지식경제위원장)고 공격했다.



 그러나 ‘최틀러’로 불린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 부임한 뒤엔 그에 대한 견제가 이뤄졌다고 한다. 결국 2011년 5월 그는 차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를 떠받치던 정권의 힘은 확 빠진 상태였다. 임기 말로 접어들면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실세였나?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과거엔 분명 실세였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그의 말이 맞다. 4월 총선에서 스스로 실감했을 거다. 그는 고향 대구 중-동에 출마했다. 7만626명의 유권자 중 그에게 표를 던진 이는 3802명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관련됐다는 비리설은 하나가 끊어지면 또 하나가 돌출했다. 민간인 불법사찰의 배후설에서, 아프리카 카메룬의 다이아몬드 매장량을 부풀려 주가를 조작했다는 CNK 주가조작 사건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그는 SLS그룹 이국철 회장의 로비 사건으로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는 올 1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나를 공격한 게 95번이다. 지금도 되묻고 싶은데 95번 중 단 하나 팩트가 확인되거나 입증된 게 있느냐. 대한민국에서 나처럼 철저히 검증받은 사람은 몇 명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야당으로부터 95번의 공격을 받고, 초대형 사건 3개에 연루설이 나왔으나 매번 무사히 고비를 넘겼던 그는 그러나 네 번째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의혹 앞에선 검찰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수억원대의 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수십억원대 괴자금의 흔적도 발견됐다. 추가로 국정 전횡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이제 현 정부 ‘거악(巨惡)’의 상징 인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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